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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

역사 통틀어 인류가 경험한 진리는 “일체가 무상”

‘만물은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한다’는 게 붓다의 통찰
자성이 스스로부터 나왔다면 논리적 패러독스에 빠지게 돼
‘자성 있다’고 받아들이면 ‘자성 없다’ 인정할 수밖에 없어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만물에 자성이 없어 공(空)하다는 제법개공(諸法皆空)이 진리인 이유는 수없이 많겠지만, 나는 전통적으로 많이 거론되지 않은 논증 몇을 제시해 보려 한다. 오랜 옛날에 완성된 탓에 우리가 읽기에 여러 모로 까다로운 용수의 ‘근본중송’보다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논증이 우리에게 더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불자라면 누구나 들어보았을 법한 ‘연기가 공’이라는 말은 아마도 대승에서 가장 유명한 명제일 것이다. 만물이 연기하는데, 연기하는 것이 공하다면 존재하는 것은 모두 공하다는 결론에 쉽게 도달할 수 있겠다. 문제는 연기하는 것이면 과연 공한 것이냐는 점이다.

나는 복잡한 논증 없이도 이 명제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물은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한다’는 것이 붓다가 통찰한 연기의 진리다. 모든 것이 조건에 의해 생성되고 지속된다면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는 사물이 스스로의 본성, 즉 자성을 가질 수는 없다. 그래서 만물은 자성을 결여한다. 즉, 만물은 공하다. 이와 같이 연기를 받아들이면 공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공하다”는 말은 ‘자성이 없다’는 뜻이다. ‘자성’이란 스스로의 본성, 즉 내적(內的) 본성을 의미한다. ‘내적 본성’은 ‘외적(外的) 본성’과 대비되는데, 외부의 다른 속성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즉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속성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혹자는 자성을 ‘독립적 본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본성은 그 스스로 외에는 아무 조건에도 의존하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본질이라고 볼 수 있다. 자성은 ‘스스로 존재(自在)하는 본성’이다.

그런데 조건과 아무런 관계없이 스스로 내재하는 ‘내적·독립적 본성’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 서양종교에서 언급하는 신이나 영혼(같은 상상력의 산물?)을 제외하면, 우리 시대의 과학은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하고 있다.

자연세계에서 내적 본성을 가졌다고 보이는 가장 직관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질량(mass)이다. 질량은 조건들과는 독립적으로 스스로 변치 않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질량도 배경이론에 따라 다른 물리량이 된다. 뉴턴의 질량과 아인슈타인의 질량은 그들의 물리학에 따라 속성이 다른 물리량으로 정의(定義)된다. 직관적으로 불변의 속성을 지닌 독립적이고 절대량을 지닌 대상으로 여겨지는 시간과 공간 또한 아인슈타인 이후 서로 맞물려 있고 또 속도와 중력에 따라 변한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현대 과학은 이 밖의 나머지 물리적 대상 또한 모두 자성이 없다는 점을 끊임없이 밝혀내고 있다.

자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조건과는 독립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는 본성이다. 어떤 사물의 자성은 그것을 그것이게끔 해 주는 본성이기 때문에 사물의 정체성(identity)을 결정한다. 

자성은 조건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변화하지 않는다. (힌두교의 아뜨만이나 서양종교의 영혼이 불변한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주 공간에서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가 외부로부터 힘을 받지 않는 한 영원히 그 동일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관성의 법칙을 상기한다면 비유해서 이해할 수 있는 논지다. 그런데 불변하는 것은 파괴되지 않는다. 파괴되려면 물리·화학적 변화 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불변하면 불멸하게 된다. 그리고 불멸한 것은 영원히 존재한다. (그래서 아뜨만과 영혼이 영원 불변불멸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아뜨만이나 영혼 같은 상상물(?)을 제외하면) 이 세상에 영원히 불변하고 불멸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역사를 통틀어 인류가 경험해 온 진리는 일체(一切)가 무상(無常)하다는 것이다. 사물에 자성이 존재한다면 그 자성은 조건과 상관없이 불변불멸하기 때문에 그 사물을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자성을 가진 사물도 영원히 불변불멸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도 또 존재해 본 적도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자성이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논의는 그 자성을 가진 사물이 영원히 불변불멸한다는 그릇된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것은 원래의 가정이 잘못되어서 나온 엉뚱한 결론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부정하고 그 반대의 명제, 즉 “자성은 없다”를 받아들여야 한다.

조건과 상관없이 존재한다는 독립적 본성으로서의 자성이 있다면 그것은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을까? 자성이 영원히 불변불멸한 본성이라면 그 기원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1) 자성은 무시(無始)로부터 영원히 존재해 왔거나, 아니면 (2) 자성은 그 스스로부터 생겨났다.

(서양종교의 절대신이나 힌두교의 브라만 및 아뜨만 같은 상상물(?)처럼) 자성이 무시로부터 불변불멸한 채 존재해 왔을 가능성이 논리적으로 배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에서 논의한 대로, 자성의 이런 속성은 우리 일상의 경험과 맞지 않는다. 무상한 사물에 어떻게 영원 불변불멸한 본성이 깃들어 있다는 말인가?

한편 만약 자성이 스스로부터 나왔다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논리적 패러독스에 빠지게 된다:

자성은 그것이 스스로 기원할 때 이미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하지 않았다.

1. 자성이 자기기원 당시 이미 존재하고 있다면, 존재하고 있는 것을 새로 생겨나게 할 수는 없으므로, 자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2. 자성이 그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면, 아무 것도 무(無)로부터 나올 수 없고 또  자성은 다른 조건으로부터 나오지도 않기 때문에, 자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3. 1과 2에 의해 자성의 자기기원은 불가능하다.

나는 이번 글에서 현대인의 상식과 현대인이 편하게 느끼는 방식의 논리를 이용해 전통적인 논증과는 다소 다르게 공의 진리를 논증해 보았다. 한국에 계시는 논자들과 관련된 논의를 주고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64호 / 2020년 12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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