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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최종태의 ‘관세음보살’ : 성모와 성관음의 원융무애

기자명 주수완

전통과 현대적 예술미 가미된 ‘관음상’

서양미술에 기반한 기독교 성상이 토착화 된 배경은 불교조각
인체를 단순화시켰지만 리듬감과 미묘한 운동감을 품고있어
정병이 팔에 안겨 있어 마리아께 안겨있는 아기예수가 연상돼

성북동 길상사의 ‘관세음보살상’.
혜화동 성당의 ‘성모상’. 최종태 作.
남양주 봉선사의 ‘관세음보살상’. 최종태作. (2017).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 모셔진 속칭 ‘마리아 관음상’은 조각가 최종태(1932~  ) 교수의 작품이다.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특히 토착화된 가톨릭 성상(聖像) 조각의 세계를 개척한 예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적인 양식의 성상 조각을 창안하고 기독교 미술을 새롭게 재해석했다는 뜻이다. 서양의 종교미술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했다는 것은 굉장한 파격이고 혁신적인 실험이겠지만, 사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불교미술은 이미 그 길을 걸어왔다. 불교미술 역시 서쪽에서 건너왔고, 이국의 종교였으며, 이질적인 미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전통이 되었다. 아마 기독교 미술도 그러한 길을 걸어갈 것이다.

그러한 길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서양미술에 기반한 기독교 성상이 토착화되는데 있어 바탕이 된 것이 바로 불상조각이라는 사실이다. 최종태 교수의 가톨릭 성상처럼 인체를 단순화시키고 관념적으로 표현한 예는 현대서양미술에서도 비슷하게나마 찾아볼 수 있겠지만, 최종태 교수의 그 단순화와 관념화의 방식은 한국의 불교조각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때문에 그의 길상사 관음보살은 한편으로 ‘성모마리아상을 기반으로 한 관음보살상’이겠지만, 그 이전에 그는 이미 ‘관음보살상에 기반한 성모마리아상’부터 조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길상사의 관음보살상이 세워지게 된 것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의 종교를 뛰어넘는 교유의 결과이지만, 사실 성모상 조각으로 유명해진 최종태 교수는 마음 속에 이미 관음상을 품고 있었다. 가톨릭에 입문하기 전 오랜 기간 불교 공부에 매진하면서 이미 그의 예술성 속에 조각적 본성으로서 불상조각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법정 스님이 최종태 교수를 선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이미 작가 안에 관음상이 자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의 관음상에서는 ‘삼산관 금동반가사유상’(국보83호)이나 ‘부여 규암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과 같이 인체를 단순화시키는 가운데 훤칠하면서 리듬감이 느껴지며 그 안에 미묘한 운동감을 품고 있는 보살상들이 엿보인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박봉수 화백이 주로 ‘일월식보관 금동반가사유상’(국보78호)을 주요 모티프로 삼았던 것에 비해 최종태 교수는 보다 단순한 형태의 삼산관 사유상을 1965년에 접하고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조각의 깎아내는 작업은 곧 불필요한 것을 덜어냄으로써 가장 순수하고 본질적인 것만 남기는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삼산관 사유상의 단순하고 명쾌한 조형성은 한국 조각의 전형이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소녀나 성모의 이미지를 통해 순수함의 본질을 드러내보려고 했다고 밝혔다. 그 순수함이란 무엇일까? 사실상 종교의 본질일 것이다. 예수께서도 “누구든 이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서는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불교에서의 순수함도 이와 다르지 않은 듯하다. 있는 것을 그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경지야말로 순수함의 최고 경지일 것이다. 더 나아가 ‘순수’란 곧 목적을 뜻한다. 즉, ‘수단’에 대응되는 개념이다. 우리가 누구를 대할 때 순수하게 대한다는 것은 그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그를 대하고 위하는 것 자체가 목적임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성상이란 사람들의 기도를 받아내는, 그래서 소원을 성취시켜주는 수단으로 오해되기 쉽지만, 진정한 기도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성상의 주인공, 그것이 석가모니이든 예수이든 혹은 성모 마리아나 관음보살이든 그분들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내가 그분들을 목적으로 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그분들처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종태 교수가 성상에 바로 그 목적으로서의 순수함을 담아내기 위해 평생을 각고했기 때문일까. 길상사 관음상 앞에 서면, 차마 나를 위한 이런저런 소원을 빈다는 것이 구차해지고 초라해진다. 모든 소원이 그저 내가 살아있다는 환희 그 자체 앞에서 무의미해지고, 그저 이처럼 순수해지고 싶은 궁극의 목적만 남은 채 정화됨을 느낀다.

그런데 이 작품은 굳이 성모상과 관음상을 결합하고자 인위적으로 의도한 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태생부터 성모 마리아와 관음보살은 서로 닮을 수밖에 없음을 작가가 분명히 꿰뚫어 본 덕분일 것이다. 이 두 성인의 역할은 중생과 절대자를 매개해주는 역할이다. 때로는 우리와 함께 고민하고 슬퍼해줄 수 있으며, 때로는 우리가 세속적인 소원을 말해도 그 소원이 속되다 혼내지 않고 들어주시거나 혹은 최소한 들어주는 척이라도 해주시는 분들이다. 우리가 어리석어도 그 어리석음을 예수께, 아미타여래께 마치 우리의 변호사처럼 변호해주고 그럼에도 우리를 잘 돌봐 달라고 우리 편에 서서 말씀해주는 그런 분들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역사적으로 강한 모성애의 이미지였고, 그래서 성모는 예수의 어머니이자 모든 가톨릭 신자들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관음보살 역시 그런 어머니의 이미지로서 여성적인 인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전통적으로는 정병을 손 끝에 들고 있는 것에 반해, 여기서는 달항아리 같은 정병이 팔에 안겨 있으니, 마치 성모자상에서 마리아께 안겨 있는 아기예수를 연상시켜 더더욱 관음임에도 성모가 연상되는 것 같다.

삼산관을 착용한 이 관음보살은 우리의 고민으로 인해 함께 고민에 빠져 있는 그런 모습이다. 여기다 조금 슬픈 속내라도 털어놓을라 치면 나보다 더 슬퍼하실 것 같아 차마 더 말씀을 드리지 못하겠다. 나의 고민은 곧 인류의 보편적 고민이 되고, 그 보편적 고민은 ‘나’에서 ‘우리’로 나아가는 힘이 된다. 그리고 그 고민을 위해 성모상의 손은 기도하고 있으며, 길상사 관음상은 불교의 시무외인, 즉 고통에서 구할 것이니 두려워 말라는 오른손 자세로 차별화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기도와 시무외인이 과연 무슨 차이가 있을까. 모두 중생을 위한 마음일 뿐이다.

한편 최종태 교수의 관음보살은 길상사에 2000년에 세워진 이후 17년이 지나 다시금 봉선사에도 세워지게 된다. 그런데 미묘한 차이가 있다. 길상사 관음이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이라면 봉선사의 관음은 ‘사랑의 기쁨’이랄까. 함께 슬퍼해주는 관음에서 이제 그 슬픔을 기쁨으로까지 바꿔주는 관음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간 듯하다. 

삼산관 사유상과 같은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가장 현대적인 보살상이 된 길상사 관음상은 이 시대 불교미술이 나아가야할 또하나의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64호 / 2020년 12월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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