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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은 치열한 수행자들 공간이었다”

  • 성보
  • 입력 2020.12.11 23:47
  • 수정 2020.12.14 09:31
  • 호수 1565
  • 댓글 0

김동하 학예연구사 연구 논문 발표
8세기 후반부터 본격 조성된 불적은
험한산지 계곡 따라 여러 곳에 위치

사람들 모여 예불·생활한 장소 아닌
스님들 공덕 쌓고 선관수행한 공간

 

천년 고도의 노천박물관이라는 경주 남산의 전경. 사진 출처=경주문화관광
천년 고도의 노천박물관이라는 경주 남산의 전경. 사진 출처=경주문화관광

‘신라 불교문화재의 보고’라 불리는 경주 남산. 60여개 크고 작은 계곡 사이로 불상·석탑·마애불 등 150여개소에 달하는 불적을 담고 있다. 이 때문에 ‘천년고도의 노천박물관’ ‘민중 신앙의 산’ 등 경주 남산을 일컫는 지칭도 다양하다.

그렇다면 남산 불적은 왜 평지가 아닌 험한 산지를 선택했고, 왜 하필 남산에 그 많은 탑상이 조성됐던 것일까. 오랜기간 궁금증을 낳았던 경주 남산 불적 조성 배경의 실마리를 풀어줄 학술 논문이 발표됐다.

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12월11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종훈)가 한국미술사학회(회장 방병선)와 함께 연 ‘경주 남산의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 학술대회에서 논문 ‘경주 남산 불적의 형성과 성격’을 통해 불적 현황과 시기별 분포, 구조를 분석해 불적 성격을 풀어냈다.

삼릉계 유적분포 드로잉 자료. '경주남산고적순례'(경주시, 1979)
삼릉계 유적분포 드로잉 자료. '경주남산고적순례'(경주시, 1979)

논문에 따르면 남산 불적 대다수는 신라하대인 8세기 후반부터 조성됐다. 두드러진 특징은 한 계곡의 초입부터 정상부까지 다수의 불적이 일정거리를 유지하면서 들어섰다는 점이다. 서남산의 용장계곡, 포석계곡, 동남산의 오산계곡, 남록의 백운계곡 등 주로 큰 계곡을 중심으로 이러한 양상이 두드러진다.

대지가 평탄하지 않고 공간이 협소한 것도 특징이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유적은 불상 주변에서 일부 석축이 발견됐으나 건물 기초부가 분명하지 않았고, 열암곡 석조여래좌상·마애여래입상도 불상 크기에 비해 매우 협소한 건물 규모를 보인다.

김 학예연구사는 “신라하대에 조성된 불적들은 예불·강설·의례·생활 등과는 다른 목적으로 조성됐다”고 밝혔다. 건물 배치·구조 등으로 볼 때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거주하며 예불하는 공간은 아니었다는 이유에서다. 예불이 목적이었다면 스님이나 불자들은 기왕에 만들어진 탑상·불상을 찾아가 예불을 하면 되지 굳이 가까운 거리에 새로운 불적을 만들 필요는 없다.

불곡 감실불상 앞 예불 모습. 사진 출처='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 학술대회 발표자료집'
불곡 감실불상 앞 예불 모습. 사진 출처='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 학술대회 발표자료집'
탑곡 마애불상군 승려상. 사진 출처='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 학술대회 발표자료집'
탑곡 마애불상군 승려상. 사진 출처='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 학술대회 발표자료집'

김 학예연구사는 “남산 불적은 끊임없이 탑상을 만들어가야할 ‘필요성’에 의해 생겨난 장소”라며 “이는 당대 유행했던 조탑 공덕신앙에 기인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실제 7세기 말, 8세기 초 한역된 ‘조탑공덕경’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등에 따르면 이 시기에 조탑 신앙이 등장해 공덕을 쌓기 위해 탑상을 잇따라 조성됐다.

현재도 황룡사·사천왕사·분황사 등 왕경 사찰에서는 ‘흙으로 만든 작은 탑’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 형상은 거칠고 투박해 전문 조예가들이 만들었다기 보단 일반 수행자들이 공덕을 쌓고자 조성했다는 게 연구자들의 분석이다.

남산 석탑이 대부분 단탑으로 구성됐다는 점도 독특하다. 사천왕사를 필두로 당시 통일신라 가람에는 대부분 쌍탑이 구성됐으나, 남산 불적에는 24곳 석탑 가운데 5곳만 쌍탑이고 나머지는 모두 단탑 구성이다. 2~3m이상인 환조의 석불좌상, 5m 이상인 마애불상, 선각의 6존상(삼존불입상·삼존불좌상) 양식엔 개성이 돋보인다.

경주지역 발굴 출토 소탑.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주지역 발굴 출토 소탑.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석장사지 출토 탑상문전. 경주국립박물관 소장
석장사지 출토 탑상문전. 경주국립박물관 소장

출가 수행자들이 공덕을 쌓기 위해 탑이나 불상을 조성할 필요가 있었다면, 경주 남산은 그들에게 최적의 장소로 보인다. 수많은 화강암이 계곡 지척에 흩어져 있고, 괴석과 암벽이 노출돼 있기 때문이다. 종교적 염원만 있다면 얼마든지 공덕을 쌓을 수 있고, 속세와 분리돼 있어 수행 장소로도 더할 나위없는 환경이다. 김 학예연구사는 "남산에 형성된 수많은 탑상 중 상당수는 수행자가 공덕을 쌓기 위한 수행과정의 결과물로 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불적의 기능은 선관 수행을 위한 장소로도 이어졌다. 일본에는 ‘산림사원’이 있다. 수행을 위해 산속에 지은 불당이다. 이는 수행 공간이면서 동시에 평지가람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다. 평지가람에서 경을 통해 불법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특정 시기에 산림사원으로 이동해 깨달음을 위한 수행을 행했다. 김 학예연구사는 ‘산림사원’ 기능에 착안해 당대 신라 스님들도 남산을 수행처로 활용했으며 동시에 왕경 사찰과 유기적인 시스템을 갖췄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김동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9년(587) 의 대세(大世)·구칠(仇柒)이 수행을 위해 ‘남산의 절(南山之寺)’로 향했다는 내용, ‘삼국유사’ 탑상 생의사석미륵조에서 도중사 생의 스님이 남산 석미륵상을 찾고 삼화령 위에 불상을 봉안했다는 이야기, ‘삼국유사’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조에 충담 스님이 미륵세존에게 차 공양을 하고자 남산에 오르내리는 일화 등이 김 학예연구사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김 학예연구사는 “남산이 왕경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장소였고, 조탑·조상으로 공덕 쌓기 유리한 현장이었다”며 “세속과 떨어져 명산과 산천에서 수행을 증진할 수 있었다는 점 등에서 남산 불적 키워드는 ‘승려’ ‘수행’ ‘공덕’”이라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이날 학술대회에는 △일제강점기 경주 남산 초기 불적 조사(아라키 준/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제3공화국과 경주 남산(강희정/ 서강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경주 남산(이명옥/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경주 남산 삼릉계 제2사지 석조불좌상의 복제와 착의법(송은석/ 동국대 경주) △경주 남산의 통일신라 시대 불교 석경(하정민/ 서울대) △경주 남산의 사리장엄구(한정호/ 동국대 경주)도 발표됐다. 이어 임영애 동국대 교수를 좌장으로 발표자와 토론자가 경주 남산 불교문화재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주고 받았다.

한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와 한국미술사학회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참석자를 제한하고 온라인 유튜브 채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바로가기)'로 생중계했다. 관련 영상은 '3:22:00'부터.

정주연 기자 jeongjy@beopbo.com

[1565호 / 2020년 12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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