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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해남사 주지 혜원 스님

“부처님 닮으려는 원력으로 발심하면 본래면목 알게 됩니다”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이끌린다면 중생의 삶에 머물러
금강경 정진대법회 연 것은 부처님 닮으려는 원력 갖기 위함
반야바라밀에 의지해 지견 갖추면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어

‘원 성취를 위한 정진’이라는 제목으로 21일 동안 매일 ‘금강경’을 21독 하는 정진법회를 올해로 세 번째 봉행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중생이 살아가는 일상에 항상 존재하는 사상(四相)에 대해 강조합니다. 사상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말합니다. 중생은 욕심이 많은 존재입니다. 아상은 욕심이 많은 존재를 지칭합니다. 두 번째 인상은 나 말고 다른 사람, 그래서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원망합니다. 세 번째는 중생상입니다. 중생은 좋은 것은 내가 갖고 나쁜 것은 네가 갖고, 맛있는 것은 내가 먹고 맛없는 것은 네가 먹어도 된다는 입장입니다. 마지막 수자상은 생명이 영원한 것이라 여기는 것으로 명예라든지 자신이 계획한 것, 자신의 위치가 영원할 것 같고 모두 나를 위해서 존재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은 집착, 애착입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삶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사람들은 좋은 것을 먹고 물건을 갖추려고 남과 자신을 비교해 더 우월해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사상을 내려놓고, 색·성·향·미·촉·법의 여섯 가지 경계에도 끌리지 않아야 합니다. 색, 소리, 향기, 맛, 감촉, 생각 등 모든 경계에 집착하지 않고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다 보면 ‘금강경’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다가옵니다. 그렇게 행을 하면 우리가 법회의 마지막에 함께 읊었던 ‘금강경’ 사구게,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꿈 같고 물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갯불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관(觀)을 하는 것입니다.

관을 한다는 것은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이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 一切苦厄)’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다 공하다는 것을 자세히 비추어보는 것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반야바라밀 수행은 크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응작여시관, 즉 ‘관법’과 ‘반야심경’에 나오는 ‘조견’입니다. 몸이 공하다는 것, 색수상행식이 공하다는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금강경’을 수행의 지침으로 삼고 21일간 21독 정진대법회을 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조건 경전을 읽기만 해서 숙달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치열하게 읽고 또 읽은 경전 속에 어떤 가르침이 담긴 것일까. 그 가르침을 들여다보고 여러분이 보리심을 일으켜서 부처님이 되겠다고 하는 발보리심을 일으키도록 돕기 위해서, 부처님을 닮아가는 원력을 세우도록 돕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정진을 통해서 모든 법이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구(不垢), 부정(不淨)하다는 것,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는 진리를 체득하겠노라는 발심을 할 수 있습니다. ‘금강경’을 하루 동안 21독을 완독하기 위해 독송하는 속도를 좀 빨리 진행했습니다. 속도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좀 더 관심을 지니게 하기 위한 일종의 수행적 장치입니다. 또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알리더라도 길이가 축 늘어지면 상대적으로 그 좋은 것에 대해서도 관심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 횟수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절을 할 때도 108배, 1000배, 3000배, 1만배 10만배, 100만배 등 일정한 횟수를 정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시작했으면 끝나는 지점이 있어야 수행을 할 때 동기부여가 된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불자들의 특성을 고려해 그렇게 정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예부터 21일간의 기도를 가장 기본으로 여겼습니다. “기도해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삼칠일 기도는 해야 한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입니다. 3일은 너무 짧은 것 같고, 7일은 하다가 그만 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왕에 마음먹고 정진한다면 삼칠일을 하자고 원력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루에 몇 회 ‘금강경’을 독송할 것인가, 그것도 생각해보니까 어차피 삼칠일 기도일을 정했으니 횟수도 삼칠번, 21회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처음에는 많은 분이 과연 이 원력을 실천할 수 있을지 염려하는 목소리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바로 이 정진의 가능성을, 수행의 가치를 몸소 증명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부처님을 닮아가겠다고 마음을 내어주셨습니다. 해남사 법요집 제목처럼 ‘공부는 발심하는 데 있다’는 문장 속에 오늘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한문으로는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입니다. 그때 새로운 눈이 보입니다. 우리 몸에 붙어있는 육신의 눈만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눈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 눈의 개념을 초월합니다. 우리는 사물을 보고 저것은 ‘사람이다’ ‘차다’ ‘아파트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1차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 “눈이 높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말은 “지견(知見)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눈을 통해서 지견이 열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지견을 다 갖추고 계신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런 지혜로운 눈을 갖추고 지옥도 멸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혜안관시지옥공(慧眼觀時地獄空)’이라고 재 지낼 때 영가에게 설하는 법문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눈으로 관하면 지옥세계가 사라져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혜안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수행을 통해서 조견과 관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와 같은 수행을 해나가는 데 기본 전제가 되는 발원이 바로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하겠다”라는 마음, 즉 발심(發心)입니다.

우리는 본래 청정한 진여(眞如)이고 법성(法性)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잠시 세상 인연과 닿아서 이렇게 저렇게 바깥으로 휘둘립니다.

여러분께서 지금은 법문하는 저를 보고 있지만 저쪽 문에서 누군가 소리를 내며 들어온다면 금방 저쪽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 것처럼 인연으로 인해 중생이 된 겁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원래 진여불성(眞如佛性)입니다. 인연이 닿아 중생으로 그동안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고 있지만, 밖으로 향함을 거두고 조견과 관을 통해 중생제도를 하고 나면 원래 그 자리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하지만 남이 가진 모양에 집착하지 말라고 해도 늘 집착이 됩니다. 누구는 뭘 입었네, 가방을 바꿨네, 화장이 진하네, 이렇게 무엇이든지 밖으로 이끌립니다.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이 뭐 어쨌습니까?

색성향미촉법에 이끌리지 말고 보시하고 수행하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삶을 발원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삶 전체가 육바라밀입니다. 누가 뭐라고 한소리를 해도 “부처님이 하시는구나” 하고 받아들이면서 “듣기는 듣되 응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워 봅시다.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을 욕하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런 이야기를 들으시고는 “응, 그래” 이렇게 답하셨을 뿐입니다.

“화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그 화를 가만히 듣고 있어라.” 한 어른께서 삶의 지혜를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화를 듣고만 있으면 상대방은 “대꾸를 하지 않는다” “반응을 하지 않는다”며 또 화를 낸다고 합니다. 그와 같은 반응은 오히려 그 화가 한풀 꺾인 것이라고 합니다. 때린 사람보다는 맞은 사람이 더 편하게 잔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좀 억울하긴 하지만, 살아가는 데 걸림 없이 내려놓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늘 생각하며 색성향미촉법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꽃비를 맞으며 ‘응무소주 행어보시(應無所住 行於布施)’를 읊었습니다.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실천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시간이 주어졌을 때, ‘금강경’의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을 하면 안 보이는 것이 보이게 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반야바라밀을 실천하면 ‘무가애(無罫碍), 무가애고(無罫碍故), 무유공포(無有恐怖)’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마음에 걸림이 없는 상태입니다. 마음에 걸림이 있는 것은 중생으로 사는 겁니다. 공포가 있는 것도 중생으로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 알면 공포가 없다고 합니다. 두려움이 있다고 하는 것도 중생입니다. 몰라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제 반야바라밀에 의지해서 삼세제불이 다 그러했던 것처럼 조금씩 부처님을 닮아가며 어느 순간에 부처님의 자리에 계시면 좋겠습니다.

‘금강경’ 정진 대법회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진정한 공덕을 지어가는 발심 수행자로 거듭나시기 바랍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11월30일 울산 해남사에서 봉행된 ‘원 성취를 위한 3차 금강경 독송 21일 21독 정진대법회 회향식’에서 주지 혜원 스님이 설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565호 / 2020년 12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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