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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제45칙 문법신보(問法身寶)

어떤 것이 법신의 보배인가

법신을 보배로 간주한 승에게
새소리 모방하는 백설조 언급
분별하는 이에게 전한 가르침

승이 앙산용 화상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법신의 보배입니까.” 앙산용이 말했다. “백설조(百舌鳥)가 나뭇가지에서 끊임없이 지저귀니, 봉황인들 어찌 함께 깃들 수 있겠는가.”

앙산용은 앙산(仰山)의 남탑광용(南塔光湧, 850~938)으로 앙산혜적의 법사이다. 본 문답은 법신에 대한 의미를 가지고 법거량한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된 법신이라는 용어는 물론 삼신(三身) 가운데 하나로 열거되는 의미이다. 삼신의 발생은 상당히 늦은 시기에 속한다. 곧 대승불교가 일어난 이후 수백 년이 지난 3~4세기 무렵에 비로소 법신과 보신과 응신 또는 화신이라는 개념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삼신의 의미는 세 가지 몸이라기보다 세 가지 측면으로 나타나는 몸의 의미로 활용된다. 그래서 법신과 응신과 화신은 본래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 다만 경우에 따라서 어떤 모습으로 설정되는가에 따라 분류한 명칭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법신은 형체가 없고 색상이 없으며 소리가 없고 맛이 없는 진여의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다. 때문에 법신은 단지 개념적인 차원으로만 사유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교교리에서 삼신의 개념을 논의할 경우에는 보신과 화신의 상대적인 입장으로 제기하여 설명한다.

그러나 본 문답에서는 삼신 가운데 하나의 개념에 해당하는 법신의 의미가 아니다. 법신은 그저 법신일 뿐이지 감각을 초월한 개념이라든가 비로자나불로 명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법신의 보배가 무엇인가를 물은 것이다. 질문한 승은 법신을 그대로 보배로 간주하고 있다. 승에게 법신은 다름아닌 보배이다. 따라서 승은 그 보배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이 필요하다. 승의 궁극적인 목표인 셈이다. 이에 대해 앙산광용은 백설조를 등장시킨다. 백설조(百舌鳥)는 백설자(百舌子)라고도 한다. 그 울음소리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새의 소리를 능숙하게 모방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래서 실속없이 말만 많이 늘어놓는 사람을 비유하기도 한다.

앙산광용은 승이 그렇게 질문하고 있는 깜냥을 벌써 파악하고 있기라도 하듯이 우선 법신에 대해서 더 이상 미주알고주알 설명으로 접근할 내용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그것을 백설조가 지저귀는 모습에 빗대어 답변으로 이어가고 있다. 끊임없는 분별심으로 백설조가 지저귀는 곳에는 봉황이 깃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문답에서 봉황은 법신을 비유하고, 백설조는 보신 내지 화신을 비유한다. 법신을 이해하기 위하여 보신과 화신의 개념을 등장시키는 것은 어디까지나 들러리를 동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법신에 대한 체험이 필요하다. 그 체험은 백설조가 봉황이 되는 체험이다. 만약 백설조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소리로 노래하는 것이다. 팔방미인처럼 능력을 발휘하여 다른 새의 울음소리를 모방하는 것으로는 결코 다른 새가 될 수 없다. 

백설조는 일설조(一舌鳥)가 되지 않으면 봉황의 경지를 엿볼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앙산탑용은 백설조가 노래하는 나뭇가지에는 봉황이 깃들지 못한다고 답변하였다. 백설조가 노래하고 있는 나무에는 굳이 봉황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백설조는 삼승이고 교학이며 분별에 해당하는 여래선의 차원에 속한다. 그러나 봉황은 일승이고 최상승이며 무분별에 속하는 조사선의 차원에 속한다. 이 경우에 여래선은 친절하고 자상하게 분별적인 언설과 문자를 동원하여 법신의 보배자리를 설명해주는 방식을 상징한다. 모든 중생에게는 바로 이와 같은 여래선의 방편이 반드시 필요하다. 보통의 중생에게는 그것만이 가장 효과적이고 지향해야 할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도직입으로 직지해주는 조사선을 필요로 하는 것은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라온 경우에 국한된다. 삼장과 십이부경을 열람하여 널리 불법의 교리에 달통한 사람에게는 도리어 그러한 것이 분별작용으로 다가오는 까닭에 그 상황에서는 반드시 일도양단하는 직지의 가르침이 요구된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65호 / 2020년 12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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