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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소복이의 ‘구백구 상담소’ 

기자명 박사

모두 아는 ‘지금’의 삶이 중요함 일깨워

비현실 설정에 현실 문제의식
책속 어딘가 짓눌린 사람들이
눌린 자국 맞추면서 답 찾아가
우리 모두가 해결책 알고 있어

‘구백구 상담소’

상담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 그들은 답을 구하러 전문가를 찾아간다. 외로워서, 두려워서,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상담을 해 주는 사람이라고 문제가 없는 ‘해결 자판기’는 아니다. 옥탑방 909호에 차려진 ‘구백구 상담소’의 소장은 찾아오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그 또한 수많은 문제를 안고 살아왔고, 여전히 안고 있다. 이 책에 나오는 이들은 어딘가 짓눌린 사람들이다. 눌린 자국을 요철처럼 맞춰보며 스스로의 답을 찾아간다.

주인공인 상담소 소장을 포함하여, 등장인물들은 어딘가 조금씩, 혹은 많이 이상하다. 하루 종일 누워있고 싶은 게 고민인 남자는 상담소 테이블에 누워 상담을 청한다. 만화가가 되고 싶은 남자는 종이에 칸만 그린 채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끊임없이 걱정하고 있다. 어느 날은 시키는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초등학생이 오고, 어느 날은 사람의 양복을 입은 비둘기가 온다.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남자는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고, 평생을 달려 온 여자는 쉬는 방법을 모르며, 꼰대가 되고 싶지 않은 부장은 자기 입에서 말이 새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심지어 주인공의 남편은 외계인이다. 외계인 시부모님까지 등장한다. 비현실적인 설정이지만 문제의식만은 현실적이다. 

이들의 사연을 듣다보면 부처님의 말씀이 저절로 떠오른다. 삶은 ‘고통’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원인은 사소하거나 자기 자신이거나 심지어 원인 자체가 없기도 하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원하거나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걱정하는 것. 이 책을 읽다보면 지금 내 자리가 읽힌다. 그들과는 다르지만 크게 다르지도 않은 고통이 더듬더듬 만져진다.

삶이 고통인 것을 알게 되면 고통의 원인도 보이리라. 고통의 원인이 보인다면 해결의 실마리도 드러나리라. 자신만의 고통에 허우적대며 상담자들에게 오히려 위로를 받으려 할 때도 있는 어리숙한 주인공도 가끔은 현명한 말을 한다. 그 ‘현명함’에 부처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막 연애를 시작한 남자는 이미 헤어지는 것을 상상한다. “다시 혼자가 될까봐 두려워요.” 같이 있는 순간이 좋아서 앞으로 함께 하지 못할까봐 겁이 난다. 좋아하는 마음이 큰 만큼 불안함은 더 커진다. 그 마음을 토로하자 상담소 소장은 말한다. “지금 이 순간만 진짜입니다. 둘의 만남은 둘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그 계절의 온도와 바람의 세기와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과 둘의 발에 걸리는 돌멩이들이 함께 만들어갑니다. 그렇듯 둘의 헤어짐도 둘만의 힘으로 어쩔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도장 찍는 힘으로 한 문장을 덧붙인다. “‘지금’만 믿으세요.”

아이를 낳고 “눈을 뜨면 내 옆에 아기가 있는 게 너무 너무 무서워서 엉엉 울”었던 주인공은 “이 아기가 나랑 아무 상관없는 아기였으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하는 시간을 지나 아기가 너무 사랑스러워 눈물을 흘리는 엄마가 된다. 서로 안 맞아 티격태격하던 부부는 그 방식 그대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다. 쓸쓸하고 피로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고통을 다독여 나간다. 이별과 죽음과 어긋남과 밀어냄. 크고 작은 고통은 아마도 계속 될 터이지만, 중중무진으로 얽힌 인연을 생각하며 오직 ‘지금’만 믿는다면 많은 고통이 연해지고 흩어지리라.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적당한 케이스들을 모아 알맞은 솔루션을 제공하는 상담이 아니다. 어떨 땐 주인공인 소장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제멋대로 상담을 듣느니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 것이다. 그런 이를 위하여 주인공은 자신이 쓰고 있던 보라색 모자를 내민다. “누구에게나 모자가 있다. 이제 모자를 쓰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차례”라며. 사실, 우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오랜 옛날에 부처님이 말씀하셨듯이.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65호 / 2020년 12월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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