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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정암사 주지 법상 스님

“사찰벽화는 부처님 말씀 집약한 또 하나의 경전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글로 표현하면 경전, 그림으로 표현하면 벽화
‘벽화 잘 이해 못하겠다’는 것은 부처님 말씀 모르겠다는 의미
벽화 살피면서 부처님 가르침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지 살펴야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는 강의의 중점은 ‘어떻게 해야 벽화를 잘 볼 수 있을까’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왜 절에 와서도 벽화에 대해 잘 모르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처님 말씀을 글로 기록하면 경전이고, 형상으로 나타내면 불상이고, 그림으로 표현하면 벽화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벽화를 잘 모른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모른다는 말이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잘 모른다는 것은 경전을 배워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경전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체득’하지 못했다는 의미입니다. 체득이라고 함은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벽화를 모른다’ ‘벽화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단적으로 지금까지 경전의 글에만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벽화 한 점, 한 점은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생하게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보고만 지나칩니다.

또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이 있습니다. 한국의 벽화에는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구름이 나오고 산수가 나오고 폭포가 나오고 학이 날아갑니다. 벽화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찾기 어렵게 그린 그림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불교를 어떻게 믿으셨습니까? 저에게 종종 “지난밤의 꿈이 어떻다”고 하면서 찾아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찾아오시는 분에게는 단호하게 말씀드립니다. “귀신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귀신을 무서워한다는 것은 무지해서 그렇습니다.”

저는 스리랑카 이주민들을 위한 포교를 18년 동안 했습니다. 스리랑카 불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분명합니다. 벽화를 보면 바로 어떤 경전의 내용인지, 부처님 일대기의 어떤 부분인지 발견합니다.

스리랑카 사원에는 전달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그림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입적하신 뒤 중국으로 불교가 넘어오는 데 500년이 걸렸습니다. 사막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불교가 넘어왔습니다. 이 세월 동안 얼마나 왜곡이 많았겠습니까. 단적인 예를 들겠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설산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위해 수행하는 모습을 폭설에 쌓인 모습으로 표현합니다. 인도를 다녀오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수행하신 지역에는 눈이 오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공부하셨다고 합니다. 보리수는 추운 지역에서 자라지 못합니다.

보리수나무 아래 수도상. 사진제공=법상 스님

스리랑카 칼루타라 사원의 벽화에 마야부인의 꿈에 코끼리가 들어오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림에는 호명보살이 없습니다. 구름도 없고 나무도, 폭포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많은 사찰 벽화에서 마야부인의 꿈에는 코끼리를 탄 호명보살이 등장합니다.

마야 부인의 꿈에 흰코끼리가 들어오는 장면이 표현된 벽화. 사진제공=법상 스님

중국 돈황의 벽화에서도 생생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법화경’을 표현한 벽화의 한 장면인데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상인이 금은보화를 가지고 험한 산중을 넘어갈 때 도적을 만나거든 그중 한 사람이라도 관세음보살 이름을 부르면 도적의 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그림이 주머니에 돈을 넣어 다니면서 도둑을 만날까 봐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염하는 모습은 아닙니다.

돈황 막고굴 제103호 보문품변상도. 사진제공=법상 스님

이 벽화에서 표현된 상인은 장사꾼입니다. 장사꾼은 우리 중생을 이야기합니다. 중생은 사량분별(思量分別), 분별심으로 생각합니다. 늘 절에 오면서도 부처가 있다, 없다고 하고 기도하면서도 영험이 있다, 없다고 하면서 중생은 계속 의심하는 병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면서도 의심하는 것이 중생의 특징입니다. 이것을 장사꾼에 비유한 것입니다.

‘상인이 험한 산중을 간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일승(一乘)이라고 합니다. 일승, 불승(佛乘), 여래장(如來藏) 등의 표현은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법화경’에 보면 일승을 구하러 가는 길은 어렵다고 합니다. 그것을 험한 산중으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도적이 누구냐는 것은 바로 나의 수행에 방해가 되는 사람입니다. 절에 갈 때가 되면 남편이 일을 시키고, 부인이 어딜 가자고 하면 갑자기 아들, 딸이 아프다고 합니다. 수행에 방해되는 모든 것은 도적입니다. 경전의 가르침은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른 경전의 한 구절을 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돈황 막고굴 제103호 보문품변상도. 사진제공=법상 스님

‘천수경’에 ‘아약향화탕 화탕자소멸 아약향지옥 지옥자고갈’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구절마다 약(若)이라는 글자가 다 붙어 있습니다. 내가 만약에 칼산지옥에 가거든, 이렇게 ‘만약’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다음 스스로 자(自)가 이어집니다. ‘칼이 저절로 없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틀렸습니다.

만약이라고 하는 것은 칼산지옥이 없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칼산지옥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있다면 마치 손에 칼을 쥔 것과 같다.’ 그다음 구절은 저절로 없어지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이 없애라’는 말입니다. 누가 없애주겠습니까? 스스로 없애라는 뜻입니다. 불지옥은 화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입니다. 그것을 누가 없애야 합니까? 스스로 없애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찰에 가면 가장 많이 보는 벽화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치아를 빼고 혓바닥을 빼고 사지를 쟁기로 갈고 끓는 물에 빠트리는 등을 표현한 지옥의 모습입니다. 그런 것이 지옥이 아닙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지옥입니다. 부부이든 형제이든 가족이든 친구이든 직장 동료이든 말이 통하지 않아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없애야 합니까? 그것도 자신이 스스로 없애야 합니다.

이번에는 라오스에 있는 탓루왕사원의 벽화를 예로 들겠습니다. 우리나라 사찰의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에서는 보통 싯다르타 왕자가 성곽을 넘어서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성이라고 하는 것은 도시의 명칭입니다. 중국에서 사천성, 복건성이라고 지역 명칭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성은 성곽이라는 개념이 아닙니다. 라오스 사원의 그림에서는 성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깊은 밤에 별을 등지고 싯다르타 태자가 궁을 지나갈 때 말발굽 소리가 날까 싶어서 하늘에 사천왕이 나타나 말발굽을 다 받드는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사찰의 벽화에서는 이런 모습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라오스 탓루왕사원의 벽화. 사진제공=법상 스님

라오스에 있는 또 다른 벽화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나서 법열의 삼매에 드셨을 때 미얀마 상인 두 사람이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때 두 상인은 부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공부 많이 하고 성스러운 분이 계시다며 공양을 올리고 가자고 뜻을 모아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먹던 그릇으로 공양을 올리자니 민망해합니다. 어떤 그릇을 쓸까 고민하는데 이때 사천왕이 나타나서 각각 발우를 바치는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공양을 마치고 난 뒤 미얀마 상인에게 기념으로 머리카락을 주었습니다. 미얀마 성지순례를 가보신 분들은 쉐다곤 파고다를 참배하셨을 것입니다. 쉐다곤 파고다는 부처님의 머리카락이 미얀마로 가서 세워진 탑이라고 유래합니다. 이렇게 벽화 한 점을 통해 우리는 경전 속에 담긴 이야기, 나라별 불교의 역사까지도 생생하게 체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라오스 탓루왕사원의 벽화. 사진제공=법상 스님

노승이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리는 모습의 경주 기림사 벽화는 오래되었지만 정말 잘 그려진 벽화입니다. 여러 사찰에서도 이 벽화를 볼 수 있지만 다른 사찰의 그림에 보면 산수가 나오고 새가 나오고 복잡하게 나옵니다. 기림사의 벽화처럼, 우리에게 꼭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만 담겨 있어야 합니다.

경주 기림사 벽화. 사진제공=법상 스님

종교는 믿으면 믿을수록 행복해져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렇다면 참다운 불자이십니다. 절에 오는데 고운 신을 신고 단장을 하는 것에만 치중하는 건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사찰을 그냥 오가기만 할 것이 아니라 사찰 벽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서도 우리가 과연 얼마만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는지 점검해 보셨으면 합니다.

제주 선덕사 사찰벽화 특강 현장. 사진제공=제주불교신문
제주 선덕사 사찰벽화 특강 현장. 사진제공=제주불교신문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지난 11월22일 제주 선덕사에서 열린 ‘2020 사찰건축학개론’ 특강에서 법상 스님이 ‘사찰에서 만나는 벽화’를 주제로 강의한 내용 중 일부를 옮긴 것입니다.

 

[1566호 / 2020년 12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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