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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제46칙 일리간산(日裏看山)

정작 달마는 중국에 왔던 것일까?

햇살 쬐는 날 구름 걷힌 산보듯
달마가 온 이유는 단순 명쾌해
해답은 ‘사상’에 있는 게 아닌
‘생활’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어

승이 운문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운문이 말했다. “대낮에 산을 바라본다.”

운문문언이 보여준 선문답 가운데 간명직절하게 답변한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런 까닭에 선종에서는 운문 선풍의 특징에 대해 일자관(一字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글자를 통해 납자로 하여금 깨침의 관문으로 이끈다는 것이다. 본 문답도 마찬가지이다. 승이 질문한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라는 것은 중국 선종의 초조로 간주되고 있는 보리달마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도래한 의미를 묻는 것이다. 이 공안은 선문답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으로서 ‘불법의 핵심적인 대의가 무엇인가’라는 공안과 함께 가장 보편적인 물음이다. 달마조사가 동래한 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대승 혹은 최상승의 선법을 전승해줄 후계자를 찾으러 온 것이다. 달마가 인도가 아닌 동방에서 후계자를 찾으려고 애써 먼 여행을 한 것은 그만큼 불법의 전개가 동류(東流)했음을 의미한다. 달마는 중국선종 나아가서 한자문화권에서 선종의 원류로서 전설이 되어 있다. 그 달마가 중국에 왔다는데 무엇 때문에 왔느냐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해 운문은 참으로 단순명쾌하게 답변을 한다. ‘대낮에 산을 바라본다’는 말로 대신한다.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맑은 낮에 구름이 걷힌 산을 바라보듯이 너무나 명백하다는 것이다. 달마가 중국에 찾아온 이유가 심심미묘한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눈앞에 놓여 있는 산을 바라보듯이 모든 사람이 항상 어떤 의심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질문한 승이 운문에게 대단히 고차원적인 답변을 기대했다면 그것은 큰 착각이다. 운문은 승이 얼굴에 뚫려 있는 두 눈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분명하다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이것은 운문이 평소에 설법하고 있는 가르침에도 잘 드러나 있다. 운문이 말했다. “납자들이여, 결코 망상을 피우지 말라. 하늘은 그대로 하늘이고 땅은 그대로 땅이며 산은 그대로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이며 스님은 그대로 스님이고 재가인은 그대로 재가인이다.”

승이 추구하고 있는 답변은 항상 일상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는 것을 일러준 것이다. 그럼에도 덕이 높은 선사라고 해서 특별한 답변을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마치 콧구멍 속에서 이빨을 찾고 머리 뒷꼭지에서 입을 찾는 것처럼 생뚱맞게 본질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만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에 대한 최초는 탄연이 오조홍인의 제자인 숭악혜안에게 질문한 문답에 엿보인다. 그 경우에 탄연이 제기한 질문과 이후 승의 질문에 대해 운문의 답변이 같을 수는 없다. 선문답의 공안이란 동일한 사람이 질문을 하고 동일한 사람이 답변을 해도 매번 달라진다. 본래부터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수학의 답변처럼 정해져 있는 공안이라면 그것은 공안이 아니라 수수께끼일 뿐이다. 따라서 질문자와 답변자가 처해 있는 상황이 항상 변화하듯이 탄연의 질문과 운문의 답변은 동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질문과 답변이 설령 언설과 글자의 표현은 같을 수가 있더라도 그것이 직지하고 있는 의미는 아득히 다르다.

마찬가지로 달마조사가 서래한 의미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답변이 대낮에 바라보는 산처럼 우뚝하고 분명하겠지만 아직 그 도리를 깨치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오리무중과 마찬가지로 분별할 수가 없다. 그러나 깊은 밤에도 여전히 선장은 그대로 그 자리에 놓여 있건만 사람이 그 모습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가 없다. 운문이 보여준 일구의 답변은 만약 근원을 철저하게 궁구하지 못하고서 제아무리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하릴없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면서 미륵보살을 향해 묻는 것과 같은 꼴이 되고 말기 때문에 가장 근원적인 이치를 터득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달마는 중국에 왔던 것일까. 오지도 않은 달마를 찾아보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달마가 도래한 의도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더욱더 요원한 문제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66호 / 2020년 12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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