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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천병근의 ‘불(佛)’과 ‘달’ : 십자가를 진 붓다

기자명 주수완

인간의 눈에 비친 깨달음 세계 담은 ‘佛’과 ‘달’

물고기 얹은 부처님 생각 속엔 ‘어떻게 하면 중생과 고해를 건널까’  
질서정연히 분리됐다가 회귀하는 색채표현은 ‘색즉시공’ 상징해
중생구제 고민하는 부처님, 앉아 쉬면서도 걱정하는 모습 절절히 표현

‘불’, 캔버스에 유채, 55×46㎝, 1980.
‘달’, 개인소장, 1980.

지난번 소개해드린 최종태 작가가 가톨릭 미술의 토착화를 이루어냈다면, 천병근(千昞槿, 1927~1987) 작가는 기독교 미술에서 그와 같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다양한 화풍을 구사했던 그이지만, 작품마다 구원의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듯하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였는데,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고초를 겪은 항일투사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일본을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아들 천병근을 고등학교부터 일본으로 유학 보냈다. 그는 일본에서 상업고등학교를 1945년 졸업한 얼마 후 해방을 맞이했지만, 계속 일본에 머물며 본격적으로 미술에 입문하게 되었다.

처음 미술공부를 시작한 YMCA 예술원에서 그를 가르친 스승은 야마다 미노루(山田稔)였는데 기독교 성화로 유명한 화가였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천병근은 그에게 종교화 장르에 깊은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어 본격적으로 일본 대학에 진학해 미술을 공부하고자 했지만 부친은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종용해 결국 1947년 귀국, 목포에서 미술교사로 활동하면서 교육에 힘썼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부산에 피난갔다가 미국문화원에서 개최한 ‘종군속사미술전’에 ‘기독의용사’라는 작품을 출품하고, 1953년 부산에서 열린 ‘5회 대한미술협회전’에 기도드리는 노부부를 그린 ‘삶’을 출품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로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도 기독교적 색채가 강했지만, 1954년 목포 기독청년회관에서 개최된 그의 첫 개인전에서 ‘피에타’를 전시하면서 본격적으로 성화가 그의 주요 주제가 되었다. 스스로는 조르쥬 루오를 좋아한다고 했다지만, 그의 ‘삶’ 속 벽에 걸린 성화는 아무래도 루오보다는 고갱의 ‘황색의 그리스도’의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피에타도 현재 원작은 사라졌지만, 첫 개인전에 전시된 흑백사진과 습작 수채화도 고갱 스타일의 성화가 아니었을까 짐작케 한다.

1955년에는 서울로 올라와 경복고등학교의 미술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더불어 그의 개인전에서는 김환기가 서평을 써주는 등 긴밀한 친분을 쌓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그가 언제 어떻게 불교를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게 되었을까. 우선 1959년 그의 세 번째 개인전에 전시한 ‘탑파’가 주목된다. 아마도 다보탑이 그 주요 모티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그림 속 탑은 마치 모자를 쓴 사람을 추상적으로 변형시켜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의인화된 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즈음부터 전통미술을 어떻게 현대적으로 재정립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경복고등학교 이후 다른 고등학교에서도 가르치던 그는 1971년 제주도로 발령이 나서 한동안 제주도에 머물게 되었다. 이 시기 그의 그림은 더욱 강렬해지고, 초현실주의적인 미술이 토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추상적인 회화에 사용되는 분위기를 그대로 풍경을 묘사하는데 적용한 듯한 자유로운 시선과 단청에 사용될 것 같은 색채들이 틀 속에서 나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듯 꿈틀거리는 강렬한 의지는 그가 그만의 방식으로 생각과 자연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완성하는데 제주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여준다.

그러던 1979년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50대 초반의 안정기에 접어든 나이였음에도 이렇게 과감하게 나선 것은 어쩌면 더 폭넓은 미술을 배우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동양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작품이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불’, 고려대 박물관 소장. 1983년.
‘만오천불도’ 부분, 일본 히로시마 후도인 소장, 고려시대.

불교를 작품에 전면적으로 내세웠던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불교는 그가 다양하게 시도했던 여러 화풍들과 또한 그림에 녹여내고자 했던 구원의 문제, 그의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한 문제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촉매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그것이 프랑스 비평가들에게도 호소력 있게 다가갔던 것이다. 프랑스에 건너간 이듬해인 1980년에 그려진 ‘불’은 특이하게 부처와 물고기가 결합된 것이 주요 모티프를 이루고 있다. 평론가들은 이 물고기를 기독교의 구원의 상징으로 보고 불교와 기독교의 결합을 의도했다고 보았다. 한편으로 물고기는 불교미술의 입장에서 보면 목어를 연상시킨다. 작품 속 물고기의 색채도 목어를 닮은 것 같다. 이 물고기는 바다를 건너는 것이고 바다를 건너는 것은 피안의 세계, 정토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을 상징한다. 이 그림 속 부처님은 오로지 ‘중생들이 어떻게 하면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가득 차있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의 다양한 색채들의 배열은 마치 자연스러운 색 혼합의 상태, 그 안에서 색이 질서정연하게 분리되어 원색으로 나뉜 상태, 그리고 하나의 색으로 회귀한 상태를 보이고 있는데, 이같은 각각의 단계를 통해 색과 공이 넘나드는 것을 색의 이합집산을 통해 상징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가 이러한 불교의 개념들을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전통의 한 부분으로서 모티프만 차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달’에 이르면 그도 불교에 상당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국보인 ‘일월식보관 반가사유상’이지만, 제목은 ‘달’을 내세웠다. 밤을 배경으로 한 바다와 산, 그리고 달과 보살은 마치 ‘수월관음도’를 초현실주의적 개념으로 재해석한 것 같다. 그리고 달, 특히 만월이 곧 관음보살을 의미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윽고  1983년에 그려진 ‘불’은 그가 불교적 모티프를 완전히 자기화된 방식으로 재해석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언뜻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은 사람을 그린 이 그림이 왜 ‘불’인지 당혹스러울 정도이나 일본 후도인(不動院) 소장의 ‘만오천불도’를 떠올려보면 중생구제를 위해 고민하는 부처가 잠시 편하게 앉아 쉬시면서도 한시도 중생을 걱정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 자비로움을 표현한 장면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병근의 그림은 마치 어리석은 중생이 얼마나 부처님 속을 새카맣게 타들어가게 하고 있는지까지 표현한 듯 절절함이 느껴진다. 

천병근의 부처는 마치 헤세의 ‘싯다르타’처럼 인간의 눈으로 바라본 깨달음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드러낸 것처럼 다가온다. 과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처럼, 우리는 이 부처님 마음에 대못을 박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66호 / 2020년 12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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