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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중도 ⑥

기자명 박희택

악과 선 다르지 않고 악의 전환이 선

악, 배척 대상 아닌 선의 자량
선과 악도 마침내 중도 합일
깨달음으로 중도불이 체득하면
타인 또한 자신과 다르지 않아

중도를 보다 실천론적으로 이해하면 ‘대비(大悲)’라 할 수 있다. 수나라 혜원은 ‘대승의장(大乘義章)’ 제1권 교취편(敎聚篇)에서 중도의 불이를 무이(無異)로 해석하면서(言不二者 無異之謂), 피(彼)·차(此)의 이원은 여여하게 평등하여 피(彼)·차(此)가 따로 없다 고 정리하였다.

혜원의 정리와 같이 자(自)와 타(他)가 이원으로 연기하는 자타이원은 불이로 무이가 되기에 자타무이(自他無異)이고, 자타무이이기에 자타동체(自他同體)이며, 자타동체이기에 동체대비(同體大悲)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동체대비의 중도철학적 이해가 된다.

나와 너는 현상으로 이체(異體)이지만 인간이라는 본질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동체라 한다. 기질의 차이에서 오는 다름을 대비(大悲)의 대상이 아닌 배척의 이유로 삼는 것은, 중도철학을 깨치지 못하여 동체대비를 절감하지 못한 까닭에서이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 제18권 붓다의 공명조(共命鳥)에 관한 가르침을 상기할 수 있겠다. 한 몸에 카루다와 우바카루다라는 두 머리를 가진 새가 공명조인데, 우바카루다가 카루다를 배척하여 독이 든 나무열매를 먹었고 결국 둘 다 죽게 되었다. 만약 우바카루다가 카루다와 동체임을 직시하였다면 보다 신중한 선택, 곧 중도대비로 대하였을 것이다.

붓다께서는 “그때의 카루다는 바로 지금의 나이고, 우바카루다는 지금의 제바달다이다. 그때 처음으로 원한을 맺게 되었는데, 나는 늘 이익이 되는 마음을 베풀었지만, 제바달다는 항상 손해를 끼치려는 마음을 가져왔다”고 인과를 밝히고 있다. 붓다는 이런 악순환의 인과를 끊기 위하여 ‘법화경’ 제바달다품에서 제바달다를 스승으로 공경한 전생담을 설하셨다.

또 다른 과거세에 붓다가 국왕으로 있으면서 묘법을 구하기 위해 전심할 때 스승으로 만난 선인을 정성으로 모신 적이 있었는데, ‘법화경’ 제바달다품에서 “그때 국왕이 나의 이 몸이요, 그때 선인이 지금의 제바달다이다. 제바달다는 깨달음을 얻도록 이끌어 주는 좋은 스승이었다”고 설하였다.

동체대비의 중도대비관은 선악을 넘어선 안목이다. 아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중생은 자와 타 가운데 자를 선으로 보는 경향성이 크기 때문이다. 종교가 대중을 선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선악의 이분법을 설하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설이 되어야 하며, 구경설은 선악의 중도합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악을 배척할 것으로 낙인(烙印)해 버린다면, 선악의 대립을 지식(止息)시키지 못하여 진정한 구원과 구제의 길이 될 수 없다.

누구보다도 이 점을 염려한 철학자가 니체이다. “그대로 하여금 유일신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대의 경건함이 아닌가? 그리고 그대의 너무도 커다란 정직함은 그대를 또한 선악의 저 너머로 데려가리라!”고 하였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4부, 일자리를 잃음). 니체는 일신교가 표방하는 유일신과 인간의 평행선, 선과 악의 평행선이 지닌 폐해를 초극하고자 절규하였다.

니체는 “선과 악을 결합시키는 소금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최악의 것도 양념이 될 수 있고 최후의 거품을 넘쳐흐르게 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아, 내가 어떻게 영원을 갈망치 않을 수 있단 말인가”라 하여(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3부, 일곱 개의 봉인)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중도합일의 소금을 말하였고, 이것이 곧 영원을 향한 것이 된다고 설파한 것이다.

니체는 같은 곳에서 “모든 악은 악 자체의 크나큰 행복에 의해 신성해지고 사면 받는다”는 언설도 보이고 있는데, 악의 행복성과 더불어 선악 결합의 소금론은 불교의 중도관에 적극 부합된다. 무명과 깨달음이 불이(不二)로 있기에, 무명의 전환이 깨달음이라는 불교의 중도변증법은 악의 전환이 선이라 본다. 악은 배척의 대상이 아니라 선의 자량(資糧)이며, 선과 악은 중도 합일된다. 동일한 관점으로 자타동체와 동체대비를 확신할 수 있다.

하여 적명 스님이 중도를 ‘사랑’이라 한 안목이 비로소 실감난다. 중도불이를 체득하면 너와 내가 다르지 않기에, 타인 또한 가장 사랑하는 자신과 같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희택 열린행복아카데미 원장 yebak26@naver.com

 

[1566호 / 2020년 12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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