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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음의 힘과 깨달음

“우리 마음은 깨달음에 이를 힘이 있는가”

깨달은 심리상태는 뇌의 물리적인 작용에 의존하고 있어
보리심 자체론 깨달음에 이를 수 없고, 세상 구제할 힘도 없어
당혹스러운 철학적 결론 ‘독자께 연말 선물로 드리는 화두’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벌써 연말이다. 분주한 가운데도 차분히 성찰의 시간을 가져볼 만한 때다. 올해의 마지막 연재가 될 이 글에서 내가 오랫동안 화두로 삼아온 질문을 나눠보려 한다. “우리 마음은 깨달음에 이를 힘이 있는가?”

논의의 전개를 위해 깨달음을 ‘깨달은 심리상태’로 정의(定意)하기로 한다. 우리 상식으로 깨달음은 몸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로 이루어진다. 만약 몸의 변화로 이룰 수 있다면 건강식과 운동 그리고 약물이나 외과적 수술을 통해 깨달을 수 있어야 할 텐데, 이는 엉뚱한 소리로 들린다. 우리는 중생구제를 위해 깨달으려는 보리심(菩提心)과 같은 심리상태1을 가지고 경전공부와 참선수행 등을 통해 드높은 위상의 심리상태2 즉 깨달은 심리상태에 이르면서 깨달음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런 전통적 견해가 우리의 또 다른 상식과 충돌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현대인은 모든 심리상태가 물리상태에 의존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구체적으로, 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작용 없이는 마음의 작용이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심리상태1(보리심)이 심리상태2(깨달음)를 결과하는 경우, 심리상태1(보리심)이 물리상태1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루어진 심리상태2(깨달음)는 그 근원을 따라가 보면 결국 물리상태1로부터 즉 뇌의 작용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깨달음이 뇌의 물리적 작용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이 결론은 깨달음이 몸의 일부인 뇌의 변화, 즉 몸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우리의 상식에 어긋난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다수의 현대인은 심리상태2(깨달음)조차도 우리 뇌의 작용(물리상태2)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아무런 물리적 기반 없이 존재하는 심리상태2(깨달음)란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일단 물리상태2(뇌의 작용)만 존재한다면 깨달음(심리상태2)도 동시에 존재한다. 보리심과 같은 심리상태1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적절한 물리상태2만 있으면 그 찰나에 깨달음이 성취된다. 그래서 이런 물리상태2를 결과할 물리상태1을 만들어 내기만 하면 깨달음이 이루어진다. 현대인의 과학적 상식에 따르자면 그렇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점선으로 된 화살표는 보리심 같은 서원으로 깨달음을 이룬다는 우리의 믿음이 존재세계에서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문을 표시한다. 이에 비해 실선으로 표시된 물리상태1과 물리상태2 사이의 관계는 분명 물리계의 인과(causation)에 해당된다. 또 이들 두 물리상태가 존재할 때 각각 보리심과 깨달음도 존재한다는 점은 우리의 상식임을 앞에서 확인했다.

위의 구도에서 보면 보리심으로부터 깨달음에 이르는 직접적인 인과의 경로는 없다. 깨달음은 보리심의 존재적 기반인 물리상태1이 확보된 이후에 그것이 물리상태2를 결과하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있다. 그래서 깨달음을 결과하는 힘은 보리심이 아니라 물리상태1이 가지고 있다. 마음 그 자체는 깨달을 힘이 없다. 만약 우리가 마음을 전혀 기울이지 않더라도 잘 만들어진 알약이 물리상태2를 결과해 내면 그 약을 먹은 사람은 아무 노력 없이도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참으로 황당한 이야기지만 현대인의 상식을 바탕으로 이치를 따져보면 거부하기 힘든 논리다.

마음이 존재세계에 인과적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는 심리형이상학에서 중차대한 문제다. 우리는 스스로의 의지로 수족을 움직이며 주위 환경과 상호작용한다고 굳게 믿지만, 조금만 살펴보아도 이런 믿음이 흔들리게 된다. 먼저 물리계가 인과적으로 닫혀있는 자족적(self-sufficient) 영역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우리는 어떤 물리적 사건1에도 그것의 물리적 원인이 있다고 인정한다. 또 그 물리적 사건1은 다른 물리적 사건2를 결과한다. 만약 어떤 물리적 사건에 신(神)의 분노같은 비(非)물리적 원인이 있다면 물리학자를 비롯해 모든 자연과학자는 자연을 설명하기 위해 신학(神學)도 연구해야 할 텐데, 이는 물론 옳지 않은 소리다.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계는 일어나는 일의 원인과 결과를 찾기 위해 물리계 밖으로 나가 신이나 마음 같은 비(非)물리적 대상을 찾을 필요가 없는 자족적이고 닫혀있는 체계다.

문제는 그 자체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져 온 심리상태가 뇌의 물리상태에 존재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문을 열려는 의도가 문을 여는 힘을 가졌다고 믿어왔는데, 실은 이 의도가 존재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뇌의 물리상태가 문을 여는 역할을 모두 한다. 의도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뇌의 적절한 물리상태만 존재하면 손이 움직여 문을 연다. 언어행위를 비롯한 우리의 모든 행위는 우리 마음의 존재유무와 상관없이 뇌의 물리상태만 있으면 그대로 수행된다. 우리 마음과 심리상태의 존재여부가 이 세상 인과의 그물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 보리심이 깨달음을 결과하는 것이 아니라 보리심에 해당하는 뇌의 물리상태와 깨달음에 해당하는 뇌의 물리상태가 실제로 이런 작업을 모두 수행한다.

깨달음을 이루는 원인이 수행자의 심리상태가 아니라 뇌의 물리상태라는 문제도 당황스럽지만, 또 다른 문제는 깨달은 의식상태가 그 자체로는 이 세상에 어떤 변화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변화를 이루는 주체가 깨달음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존재적 바탕인 뇌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보리심이 그 자체로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다는 점도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우리가 깨달아도 깨달음 그 자체로는 세상을 구제할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결론에마저 이르렀다. 이런 당혹스런 철학적 결론을 어찌 다루어야 좋을까?

이 마지막 질문이 연말을 맞아 내가 독자께 선물로 드리는 화두이다. 한 해 동안 성원에 감사드리며 내년에 다시 뵙기를 희망한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66호 / 2020년 12월2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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