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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과 배려

연말인데도 한 해를 잘 보냈다고 하는 뿌듯함도 없고 새해에 대한 벅찬 기대도 가질 수 없다. 너무 오래 세상이 아프다 보니 움츠린 자세를 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픔과 정면대결하면서 병을 치유하고 예방하는데 불철주야 애쓰는 의료진을 비롯한 관계자들이 눈물 나게 고맙고, 백신과 치료약을 개발해 내는 과학자들이 무척이나 위대하게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힘들고 아파하고 애쓰는데, 내가 아프지 않다고 해서 그저 편할 수는 없다. 이 아픈 세상을 직접 변화시키는데 특별한 재능이 없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기본적으로는 내가 병과 고통을 옮기고 확산시키지 않도록 방역수칙을 잘 따르면서 자기점검과 절제된 삶을 철저히 생활화해야 한다. 조금 불편하다고 해서 이마저도 지키지 않는다면 재앙은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위기의 상황에 우리가 근본적으로 가져야 할 태도는 공감이다. 세상의 아픔에 공감하고 아픈 이들을 배려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아픔에 연민의 정을 느끼고 동정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데이비드 흄은 같은 주파수에 떨리며 우는 악기와 같이 타인의 처지에 동정하는 마음이야말로 인간을 친근하게 맺어주는 윤리의 보루라고 말했다. 또 맹자는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어린아이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절로 일어나는 것을 예로 들어서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말했다. 불교에서는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같이 느끼고 아파하는 자비심을 강조한다. 자비심은 나와 남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영향을 주는 관계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한 몸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착한 마음과 자비심을 마음속에 그저 담고만 있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린애를 우물에 빠지지 않도록 구해주는 착한 행동과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려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보살행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산하 시인의 수필에는 항암치료 때문에 삭발한 후 창피해서 외출을 못하고 집에만 있는 친구를 위해 멀쩡한 머리를 친구처럼 깎아버리고 친구와 함께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얘기가 나온다. 세상과 담을 쌓고 홀로 아픔을 견뎌야 했던 암 환자는 그 친구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위로받고 따뜻해졌을 것이다.

공감과 배려는 개인적 미덕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강력한 사회적 힘이다. 이와 관련해 오래전에 보았던 TV 동화 이야기가 새삼 떠오른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한 사람이 높은 재를 넘다가 기력이 다해 길가에 쓰러져 있는 노인을 발견하지만 자기도 힘들고 갈 길이 바쁜 그 사람은 못 본채 그냥 지나쳐간다. 그 뒤에 또 한 사람이 그 길을 가다가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고 주저 없이 등에 업고 길을 간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힘들게 재를 넘어 마을 어귀에 이르렀을 때 앞서 혼자 가던 사람이 추위에 쓰러져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혼자 살겠다고 외투를 움켜쥐고 길을 가던 사람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었지만, 쓰러진 사람을 업고 가던 사람은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덥힐 수 있었기에 함께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의 흐름은 한 쪽 극에 이르게 되면 다시 반대 방향의 흐름으로 돌아간다. 한겨울의 극심한 추위 속에서 따뜻한 기운이 새로 돋고 자라나서 봄이 되는 것과 같은 극즉반의 이치이다. 이러한 자연의 움직임을 본받아 인간과 세상도 끝없는 불행으로 치닫는 흐름을 돌이키는 지혜를 발휘하기를 바란다. 온 세상이 흙탕물 속에서 고통스러워 할 때 그 속에 뛰어들어 함께 호흡하고 공감하며 한 줌 희망의 씨앗을 심는 따뜻한 배려의 마음이 불행을 돌이키는 흐름을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허공 속에서는 씨앗을 심어도 자랄 수 없지만 더럽고 썩은 흙 속에서는 씨앗이 무성하게 자랄 수 있다. 새해에는 흙탕물 속에서 중생과 함께 아름답게 피는 연꽃의 모습을 보며 따스한 날을 맞이하고 싶다.

정영근 서울과학기술대 명예교수 yunjai@seoultech.ac.kr

 

[1567호 / 2020년 12월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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