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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젊은날의 선택] 통도사 염불대학원 학인 보설 스님

  • 새해특집
  • 입력 2021.01.05 11:05
  • 수정 2022.03.19 11:50
  • 호수 1568
  • 댓글 3

“누군가에게 환희심 갖게 하는 것 그게 출가한 이유죠”

해병대 군복무 시절 만난 군법사스님 자비로운 모습에 감화돼 출가 결심
모든 게 낯설었던 행자시절, 고되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나를 바꾸는 계기
통도사염불대학원 졸업 후 동국대대학원 진학해 교학연구 매진 발원세워

일상의 공허함에서 벗어나고자 출가한 보설 스님은 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게 꿈이다. 사진=주영미 기자
일상의 공허함에서 벗어나고자 출가한 보설 스님은 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게 꿈이다. 사진=주영미 기자

보설 스님(29)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출가는 자신과 무관한 일이었다. 신심 깊은 부모 밑에서 성장해 어려서부터 절을 찾는 일이 많았지만 스님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의 꿈은 패션아티스트였다. 멋진 옷을 입고 남들에게 주목 받는 삶을 동경했다. 대학에서 ‘패션웨딩스타일리스트학과’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기에 삭발을 하고 먹물 옷을 입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랬던 그에게 불연이 찾아온 것은 군대에서 군법사 지화 스님을 만나고 나서였다.

2011년 7월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내성적인 성격을 바꿔보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기왕 군대를 간다면 남들과 다른 환경에서 군 생활을 해보고 싶었다. 강인한 체력이 요구되는 해병대에서 복무하는 것은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서 ‘로망’이기도 했다.

포항 해병대 교육훈련단에서 시작된 군 생활은 난관의 연속이었다. 극한으로 내모는 고된 훈련, 엄격한 규율, 틈만 나면 계속되는 선임병들의 얼차려는 입대 전 품었던 해병대의 ‘환상’을 오래지 않아 깨버리게 했다. 중도에 포기할까를 고민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된 훈련 속에서 유일한 안식처는 주말마다 찾았던 군법당이었다.

군법사 지화 스님은 훈련병들에게 친형 같은 존재였다. 지친 훈련병들을 살뜰히 챙겼고, 고민거리도 흔쾌히 들어줬다. “피곤하면 자라”는 스님의 유명한 법문(?)이기도 했다. “법당은 지친 마음을 편히 쉬게 하는 곳이지, 내 법문을 듣고자 오는 곳이 아니다. 훈련병들이 짧게라도 숙면을 취하는 게 오히려 그들에겐 감로수”라는 게 스님의 지론이었다.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 지화 스님에게서 부처님의 자비심이 느껴졌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언젠가 스님처럼 이웃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발원으로 이어졌다. 스님의 잔상은 제대 이후에도 이어졌다.

2014년 8월초, 장마가 물러나자 숨 막히는 불볕더위가 밀려들었다. 습기를 한껏 머금은 공기가 세평 남짓 작은 방을 가득 채웠다.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밤새 괴롭혔던 술기운은 날이 밝아도 떠날 기미가 없었다. ‘이게 직장생활인가.’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남들보다 먼저 사회경험을 쌓겠다며 군 제대와 함께 시작한 직장생활이었지만, 하루하루 삶에 대한 의문만 커졌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똑같은 일과, 하루가 멀다고 계속되는 술자리. 반복된 일상의 공허함은 매일 아침 깨질 듯 머리를 짓누르는 숙취만큼이나 그를 괴롭혔다. 그럴수록 마음 한편에선 군대에서 만난 군법사 스님의 맑은 얼굴이 스쳐지나갔고, 출가에 대한 관심이 새록새록 커졌다.

여름이 끝자락으로 향하던 2014년 8월말,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다. 휴학했던 대학에는 자퇴서를 냈다. 출가 결심을 굳히고 부모님을 찾았다. 늦은 나이에 결혼해 40세에 얻은 외동아들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결심을 존중했다. 직접 차를 몰아 지리산 길상암까지 동행했다. “건강하게 뜻한 바를 꼭 이루길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부모님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길상암은 그가 어려서부터 다녔던 절이었고, 주지스님은 아버지와도 인연이 깊었다. 스님은 그에게 출가수행자의 길을 일러줬다. ‘결코 쉽지 않은 길’이라는 말도 건넸다. 언제든 돌아가도 좋다고도 했다. 스님은 예불, 마지공양 올리는 법 등 사찰에서 행자가 해야 할 기초의식을 가르쳤다. 본격적인 출가에 앞서 출가수행자의 삶을 체험해보라는 배려였다. 그렇게 한 달여가 지나자 스님은 “출가수행자는 대중생활을 해야 한다”며 해인사로 가라고 했다. ‘그곳에서 배우고 익혀 반듯한 수행자가 되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그해 10월, 해인사는 가을의 중턱을 향하고 있었다. 대중들은 겨울준비로 부산했다. 각자 정해진 소임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당시 해인사 재무국장 지묵 스님과 사제의 연을 맺었다. 은사스님은 그에게 보설(普設)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널리 베풀고 살라는 의미였다. 스님은 “행자 때 공덕으로 평생 중노릇을 하는 것”이라며 “초발심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삭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길었던 머리카락은 가을 낙엽 지듯 힘없이 무릎 앞으로 쏟아져 내렸다. 비로소 출가수행자의 길에 들어섰음을 실감했다. 낯선 삶에 대한 기대감과 두려움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해인사에서의 첫날밤은 설렘과 두려움으로 뜬 눈으로 지샜다.

해인사에서는 그를 법명대신 5번 행자로 불렀다. 절에 들어온 순서에 번호를 매겨 부르는 것은 해인사의 오랜 전통이었다. 고된 생활을 견디지 못해 중도에 포기하는 행자들이 많았기 때문일 수 있었다.

행자생활은 예상보다 고됐다. 새벽 3시부터 시작된 절의 일상은 정신없이 돌아갔다. 새벽예불에 앞서 도량석을 돌고, 마당을 쓸고 대중공양 준비했다. 사찰 운력에 빠짐없이 참여해야 했고, 틈틈이 스님으로서 갖춰야 할 습의도 익혀야 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랐다.

어느 것 하나 손에 익지 않은 탓에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먼저 절에 들어온 선임행자의 경책이 날아들었다.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고 갓 들어온 행자의 ‘군기’를 잡는 것은 선임행자들의 몫이었다. 선임행자들은 5번 행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한번은 사찰 전각마다 부처님에게 올리는 마지를 빠뜨린 일이 있었다. 당시 행자 다섯 명이 8개 전각에 부처님 마지공양을 올려야 했다. 그렇기에 후임행자는 전각 두 곳에 마지를 올려야 했다. 그날은 짜장면이 특식으로 나온 날이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짜장면 생각에 그만 한 전각에 마지공양 올리는 걸 깜박했다. 선임행자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선임행자는 ‘정신 좀 차리라’며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순간 분심이 송곳처럼 마음 밖으로 삐져나왔다. ‘스님이 되려고 출가했지, 일하려고 절에 왔나.’ ‘군대에서 선임병들의 괴롭힘을 참아왔지만, 절에서까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나.’ 불현듯 솟구쳐 오르는 분심은 주체하기 힘들 정도였다. 마지막 부처님 마지공양만 올리고 떠나겠다고 맘먹었다.

전각에 들어서 부처님을 올려다봤다. 무작정 절을 시작했다. 1배, 2배, 3배, 4배…. 쉴 새 없이 몸을 낮추고 낮췄다. 한 겨울에도 땀이 옷을 적셨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다시 부처님과 마주했다. 순간 ‘나’라는 생각에 갇혀 분심을 쏟아냈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눈물이 주룩 흘렀다.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듯 후련함이 찾아들었다. ‘나’라는 생각을 비우자 주변은 달리 보였다. 고된 일상은 스스로의 경계를 확인하는 공부의 시간이었고, 선임행자의 잦은 경책도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따뜻한 가르침으로 다가왔다.

6개월의 행자생활은 2015년 3월 직지사에서 사미계를 받으면서 끝을 맺었다. 보설 스님은 2016년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부에 입학했다. 함께 사미계를 받은 많은 도반들이 해인사 승가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는 동국대를 선택했다. 출가하기 이전 제대로 해보지 못한 대학생활의 아쉬움도 있었지만, 4년간 대학에서 다양한 학문을 접하면서 체계적으로 교학공부를 해보고 싶은 이유에서였다. 대학생활은 흥미로웠다. 일반학생들과 조별과제를 만들고, 강의도 빠짐없이 참여했다. 교학에 대한 이해도 차츰 깊어졌다. 그러면서도 정각원 법당에서의 기도도 빠지지 않았다. 기도는 스님이 대학생활에서 빼놓지 않았던 일과 가운데 하나였다.

“출가했다고 단번에 도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일상에서 끊임없이 중생심이 일어날 때가 적지 않았죠. 기도는 스스로 일상을 돌아보고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가겠다는 발원의 시간이었습니다.”

4년의 시간은 눈 깜박할 사이에 흘러갔다. 보설 스님은 2020년 9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정식 스님이 되는 첫 관문을 넘었지만 스님은 안주하지 않았다. 다시 2년제 과정의 통도사 염불대학원에 입학했다. 동국대를 다니면서 부족했던 불교의식을 체계적으로 배우겠다는 생각에서다. 이 과정을 거치면 다시 동국대 대학원에 입학해 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해보겠다는 계획이다.

출가한지 올해로 꼭 7년. 보설 스님에겐 아직 부족한 것이 많고, 가야할 길도 멀다. 스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스님은 출가할 때 세웠던 서원만큼은 잊지 않는다. “군복무 시절 지화 스님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를 닦고 변화시켜 나로 인해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환희심을 가질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부처님 법에 의지해 일상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겠습니다.” 스님은 자신이 발원한 그 길을 향해 또 한 발을 내디뎠다.

부산=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568호 / 2021년 1월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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