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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고대불교-고대국가의발전과불교 (61) 결론-왕권의 신성화와 불교 (15) (5) 맺음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 - 하

성골 개념은 실추된 여왕 권위 높이려 창안된 정치적 수사 불과

‘중고’는 왕실불교로 출발해 왕권강화 기여하며 진종설화 발전
전륜성왕 설화·석가족 설화 거쳐 선덕여왕 때 성골신화 이어져
진덕여왕 때 정치실권과 종교신성 모두 잃으며 ‘중대’로 넘어가 

황룡사 목탑지 전경.
황룡사 출토 사리기.

신라의 특수한 신분제도 골품제(骨品制)는 고대사회의 실태를 잘 나타내는 핵심적인 주제어다. 골품제는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와 일반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가 별도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으나, 법흥왕대 율령체제 성립으로 하나의 체계로 통합되었다. 신라사회는 골품 등급, 즉 신분 등급에 따라 정치적 지위가 결정됐을 뿐 아니라 일상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부여되었다. 골품제는 왕족인 성골과 진골, 중・하위 귀족인 6~4두품, 평민에 속하는 3~1두품 등 8등급으로 구성되었으며, 관청이나 귀족들에 예속된 노비는 골품제에 포함되지 않는 탈락계층이었다. 

그런데 같은 왕족이면서도 성골과 진골로 구분되는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학계에서는 ‘중고’ 왕실인 진흥왕의 혈통 가운데 (동륜태자)-진평왕-선덕여왕・진덕여왕 계통은 성골, (진지왕)-용수(춘)-김춘추 계통은 진골로 구분하고, 그 이유에 대해 모계설・배우자설・정치적 사건 연루설・친족분화설 등과 함께 성골의 비실재설이나 추존설에 이르기까지 추측성 주장들이 난무한 상태이다. 필자는 두 계통 사이에는 혈연이나 정치적 위상 면에서 신분차등의 어떠한 이유도 발견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관점을 달리해 이유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물론 이글을 집필한 취지나 의도는 골품제도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고, 성골과 진골의 구분 이유를 찾으려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주된 관심은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불교가 담당했던 사회적 역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특히 왕권의 강화와 불교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인도 초기불교 성립단계부터 중국불교사 전개과정에서 불교와 왕권의 관계가 밀접하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신라의 고대불교도 왕권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이루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불교를 공인한 왕은 법흥왕이었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다가 순교당한 이차돈은 왕의 근시직인 사인이었다. 신라의 불교전래에 선도적 역할을 한 선산 지역의 모례는 부족이나 씨족의 족장세력을 대신하여 지역사회의 새로운 교체세력으로 등장한 대가족의 가족장 계층이었다. 반면 불교공인의 반대세력은 연맹왕국의 6부회의체 전통을 계승한 귀족들이었다. 그러나 ‘중고’기인 법흥왕대에 들어와서 율령반포를 계기로 골품제와 관등제를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가 정비된 것에 비례해 왕권이 강화되어 갔고, 급기야 불교의 공인과 상대등의 설치로 국왕은 6부회의 체제에서 벗어나서 초월적 지위로 상승하였다. 

불교학자 고익진은 신라 초기불교의 중심사상을 업설(業說)로 보고, 귀족세력의 특권이나 신분적 지위를 뒷받침하는 논리로 작용하였다고 주장하여 폭넓은 지지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의 신라불교에서의 업설의 내용에 대한 이해도 부정확하고, 더욱 역사적 사실과도 괴리되는 주장에 불과하다. 불교의 핵심개념은 연기설(緣起說)이고, 그것은 상의상관성의 논리로써 고대국가의 발전과정에서 왕권강화와 부족통합의 이념 역할을 하였다고 본다. ‘천전리서석’의 명문 가운데 다음의 기사는 왕권과 불교의 밀접한 관계를 명백히 증언해 주고 있다. “갑인년에 대왕사(大王寺)의 안장(安藏)이 짓다.”, “을묘년 8월 4일 성법흥대왕(聖法興大王) 때에 도인비구승 안급이(安及以)와 사미승 수내지(首內至), 거지벌촌(居智伐村)의 중사 □인들이 보고 쓰다.” 이상 두 구절의 자료는 법흥왕 21년(534)과 22년(535)의 사실을 말해 주는데, 앞서 법흥왕 14년(527) 불교 공인과 사찰 창건의 시도는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7~8년 뒤에 다시 공사를 재개하게 되었는데, 그 사찰의 이름을 ‘대왕사’, 법흥왕의 왕호를 ‘성법흥대왕’으로 칭하였고, 그 명칭을 붙인 주인공은 바로 승려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법흥왕 23년(536)에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세움으로써 국가발전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사찰 공사는 다음대의 진흥왕 5년(544)에 마쳤는데,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로 이름을 붙여 왕중왕, 곧 법흥대왕의 사찰이었음을 선포하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허가함으로써 불교교단을 성립시켰다. 또한 앞서 창건 공사를 개시하였던 법흥왕과 부인은 말년에 출가하였는데, 부인 법류(法流)는 최초 비구니 사찰인 영흥사에 머물러 생을 마감하는 등 왕실불교로 출발하였다.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과 법흥왕의 딸 지소부인 사이에서 출생한 진흥왕은 왕권강화와 영역확장을 추진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조성하였는데, 즉위 14년(553)에 황룡사를 창건하여 ‘중고’ 불교 중심사찰로 삼았다. 그런데 황룡사 자리는 원래 왕궁을 축조하려던 곳으로 경주 분지 중심 지점이었다. 남쪽에 치우쳤던 월성을 벗어나 중심으로 왕궁을 옮기려던 계획을 변경하여 사찰을 세운 것은 불교를 새로운 국가이념으로 삼으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그리고 27년(566) 황룡사를 준공하던 해에 기원사와 실제사를 창건하여 불교중심의 도시를 지향하였다. 또한 35년(574)에는 황룡사에 거대한 장륙존상을 조성하였는데, 조성의 연기설화에서 불교의 이상적 제왕 아육왕(阿育王,Aśoka)과의 인연을 염설함으로써 전륜성왕 같은 위대한 제왕의 염원을 나타내었다. 

중국에서는 4세기경부터 아육왕이 만든 석가불상에 대한 전승이 성립되어 6세기까지 이어졌다. 특히 6세기 전반 양 무제의 아육왕탑상 숭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크게 유행했는데, 신라에서 공인 당초부터 양의 불교를 받아들인 사실을 고려하면 진흥왕의 장륙존상 조성은 양 무제의 아육왕 숭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진흥왕은 말년에 머리를 깎고 법운(法雲)이라 칭하였고, 부인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다가 세상을 떠났다. 한편 진흥왕은 자녀 이름에 동륜(銅輪), 사륜(鐵輪,또는金輪), 은륜(銀輪,화랑세기) 등 전륜성왕의 이름을 붙여 위대한 제왕으로의 성장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태자로 책봉된 큰 아들(동륜)이 일찍 죽고, 둘째 아들(사륜)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즉위 4년 만에 귀족회의에서 폐위당함으로써 전륜성왕을 지향했던 왕권강화의 기도는 좌절되었다.

동륜태자는 즉위 전에 사망함으로써 전륜성왕의 꿈을 실현하지는 못하였으나, 자신의 세 아들의 이름에 석가부처 가족의 이름을 붙여 왕실의 불교적 신성화를 추구하였다. 즉 큰 아들은 석가의 아버지 이름인 백정(白淨,또는淨飯), 나머지 두 아들은 석가의 3촌인 백반(伯飯,또는白飯)과 국반(國飯,또는斛飯)으로 지어 인도의 석가족 왕실의 재현 모습을 연출하였다. 또 진평왕으로 즉위한 백정의 부인 이름도 선비는 마야부인(摩耶夫人), 후비는 승만부인(僧滿夫人)으로 지어 석가의 어머니와 ‘승만경’의 주인공 이름을 붙였다. 이렇게 전륜성왕이나 석가족에 가탁하여 왕권의 신성화를 추구하는 것을 진종설(眞宗說)이라고 하는데, 진흥왕대는 전륜성왕, 진평왕대는 석가족으로 신성화의 롤모델이 바뀌었다. 진평왕은 54년의 재위 동안 내적으로 중앙행정관서를 설치하고, 양궁・사량궁・왕궁을 통합 관리하는 내성을 설립하는 등 지배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밖으로 고구려・백제와 경쟁하면서 중국 남조의 진, 이어 통일왕조의 수・당과 교류하면서 불교문화를 받아들여 ‘중고’기 불교문화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진평왕의 안정적인 왕권 구축에도 아들을 두지 못함으로써 왕위 계승 문제가 정치 불안의 요소로 부각되었다. 진평왕이 사망하기 8개월 전 일어난 이찬 칠숙(柒宿) 등의 반란은 왕위계승 경쟁의 일환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진평왕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인물은 큰 딸인 선덕여왕이었는데, 즉위 당시 이미 50년을 넘긴 노년이었다, 그녀는 국정을 담당하지 않고, 종실의 원로인 을제(乙祭)가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러나 정치운영은 상대등 수품(水品)과 내성사신 용수(龍樹)가 참여하는 귀족연합의 과두체제 방식이었다. 고대제왕 권위의 요소인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신성 가운데, 선덕여왕은 정치권력을 상실하고 종교적 신성만을 강조하였던 사정이 분황사와 영묘사의 창건, 백고좌회의 개설, 황룡사 9층목탑의 조성 같은 빈번한 대형의 불사, 지기삼사(知幾三事)와 같은 종류의 선덕여왕의 예지력을 전해주는 설화들을 남겼다. 반면 진평왕대의 지배체제 정비 성과는 일체 거두지 못하였으며, 대외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으로 낙동강 서쪽 방어 요지인 대야성을 상실하고, 당과의 교통로를 봉쇄당하는 위기를 맞았다. 그리고 마침내 선덕여왕은 말년(647) 정치적 무능을 이유로 내건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 중 세상을 떠났다.

선덕여왕 이후 4촌 자매인 진덕여왕이 왕위를 이었는데, 국정은 원로귀족인 상대등 알천(閼川)을 수장으로 하는 과두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권력은 이미 외교권을 장악한 김춘추와 군사력을 장악한 김유신의 연합세력에게 넘어갔다. 진덕여왕대 대외적으로 활발한 대당외교와 대고구려・백제와의 연속된 혈투, 대내적으로 유교이념에 의거한 정치・문화의 대대적인 개혁이 김춘추 일파에 의해 추진됨으로써 ‘중대’라는 새로운 시대로 들어갔다.

결론으로 신라의 ‘중고’불교는 법흥왕대 처음 공인될 때부터 왕실불교로서 출발하여 역대 왕권의 강화에 기여해 오면서 진종설화를 성립시켰다. 앞서 진흥왕대는 전륜성왕 설화, 진평왕대는 석가족 설화, 마지막 선덕여왕대와 진덕여왕대는 부처의 사리신앙에 의거한 성골신화 등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선덕・진덕여왕대에 이르면 고대왕권의 두 요소 가운데 정치권력을 상실하고 종교적 신성만에 의지하여 왕위를 유지하였다. 선덕여왕의 부왕인 진평왕은 정치적 실권과 불교적 신성을 겸함으로써 왕권의 안정과 지배체제의 정비를 이룩할 수 있었던 반면, 선덕여왕은 정치권력을 상실한 상태에서 불교라는 종교의 신성 만에 의지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진덕여왕은 정치적 실권과 함께 종교적 신성도 상실한 상태로 이름만의 왕위를 지키는, 사실상 ‘중대’로 넘어간 과도기였다. 결국 왕족은 진골로만 통칭되는 계층이었고, 성골은 진골과 구분되는 별개의 신분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부처의 사리를 의미하는 ‘성골’의 개념을 끌어와 실추된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정치적 수사로 활용한 것이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성골은 정치권력을 상실한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재위 당시 자신들의 권력기반을 구축하는 기회로 활용한 용수와 김춘추 부자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에 의해 창안된 불교신화로서의 정치적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일찍이 신라 골품제 연구의 첫 장을 장식한 이마니시류(今西龍)는 성골에서 진골로의 변화가 진지왕의 폐위사건이나 용수의 모계(母系)에 의한 출자가 문제였을 것으로 추측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성골의 실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바 있었다. 그리고 사회인류학의 Lineage(계보친족)의 분지화(分枝化) 이론을 적용하여 성골 신분의 상승설을 새로 제기하였던 이기동은 용수의 배우자가 진평왕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들어 자신 주장의 난점을 시인하고, 결국 성골도 ‘중고’ 왕자지배의식의 합리화에 불과한 것일지 모르겠다고 물러섰던 사실을 유의할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69호 / 2021년 1월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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