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가능세계
26. 가능세계
  • 홍창성 교수
  • 승인 2021.01.12 09:33
  • 호수 15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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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그물에서 벗어난 독립적 실체는 없다 

‘논리적으로 가능한 상태' 가능세계 개념은 서양철학서 출발
가상세계 개념 불교철학에 도입하면 연기법 진리 확연히 확인
연기 진리 외면하고 실체·자성 언급하는 건 정직하지 못한 것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불교의 삼천대천세계는 부처님 한 분이 교화하는 범위다. 무한히 많은 부처님이 계시므로 존재세계도 무한하다. 불자들은 이런 세계가 실재한다고도 혹은 상상으로만 존재한다고도 여길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다수 세계의 개념은 본질(자성)과 실체 개념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17세기 라이프니츠(1646~1716)는 우리 세계가 존재하게 된 과정을 ‘가능세계’의 개념을 도입해 설명한다. 신이 창조 가능한 세계는 무한하나 신은 본질적으로 선(善)하기에 이 가운데 최선의 세계를 골라 창조했다는 것이다. 가능세계 개념은 이렇게 서양철학에 등장했다.

현대철학은 가능세계를 어떻게 이해할까. 20세기 중반까지 영어권 철학자들은 대체로 과학이 받아들이지 않는 대상을 실재로 인정하지 않았다. 가능세계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고 그저 ‘논리적으로 가능한 상태’ 정도로 보았다.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가능세계란 ‘논리적으로 정합적인 문장의 집합’이다.

당신은 오늘 점심으로 국수를 먹을 수도, 김치찌개 백반을 먹을 수도 있다. 이 두 경우는 당신의 세계를 기술하는 어떤 문장과도 모순되지 않기에 이 두 논리적 가능성은 두 가능세계를 보여준다. 국수를 먹은 다음 차를 마실지 아니면 커피를 마실지, 차를 마신 다음 버스를 탈지 또는 지하철을 탈지가 각각 다른 가능세계를 나타낸다. 이같이 존재세계에는 무한한 수의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모두 논리적으로만 가능할 뿐 실재하는 세계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 하나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이런 가능세계가 단지 논리적 구성물이 아니라 실재하는 세계라는 주장이 대두한다. 이런 경향의 철학자들은 가능세계를 마치 망원경으로 발견하는 새로운 태양계 또는 은하계의 행성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또 20세기에 양자역학으로부터 논의되기 시작해 요즈음 공상과학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도 그런 세계다. 내가 선호하는 가능세계는 위의 두 입장의 중간에 해당된다. 먼저 두 견해의 문제점을 지적해 보겠다. 첫째 견해는 예를 들어 ‘불을 뿜는 용’이나 ‘페가수스(날개달린 말)’ 존재도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기에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사물의 존재가 논리로만 결정된다면 논리적으로 모순이 아닐 때 모두 존재 가능해야 하기에 이는 상식과 어긋난다.

둘째 견해는 철학의 금과옥조인 ‘사유와 존재의 경제성 원리’에 어긋난다. 지적 작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우리는 가능하면 작은 수의 원리로 설명하고 또 존재세계도 가장 작은 수와 종류의 존재자로 구성돼야 한다는 말이다. 실재하는 무수한 세계와 무한히 많은 평행우주 존재를 인정해서 존재세계를 한 치의 공간도 없이 채워야 한다는 견해는 철학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나는 ‘우리의 언어적 직관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가능한 상황’이 가능세계라고 보는 중도적 견해를 선호한다. ‘언어적 직관’이란 ‘보통사람의 상식’으로 이해해도 된다. 이 견해는 상식적 과학관이 허용하는 만큼만 세계와 그 안의 사물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리고는 이 사물에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는 가능한 상황 하나를 하나의 가능세계로 본다. 홍창성이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진정되면 귀국해서 삼보사찰 순례에 오를 상황은 (상식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가능세계다. 그렇지만 홍창성이 도를 깨쳐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 하늘로 오를 상황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능세계가 아니다.

위에서 ‘상식적’이라는 개념이 분명치 않다고 볼 수도 있는데, 그래서 원래 ‘우리의 언어적 직관’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이다. 동일한 언어(예를 들어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직관적으로 허용되는 범위가 내가 표현한 ‘상식적 세계관’에 해당된다.

가능세계에 대한 소개는 여기서 멈추고 불교철학에 가능세계의 개념을 도입해 보겠다. 전통적으로 철학에서는 실체(實體)를 ‘독립적 존재’로 정의(定義)하는데, ‘a가 실체’라는 말은 ‘오직 a 하나만 존재하는 가능세계가 있다’는 뜻이다. 다른 사물은 전혀 없이 a 하나만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면 a는 분명 독립적 존재이겠다. 그런데 과연, 예를 들어, 책상이나 바위 같은 것 하나만 있는 가능세계가 존재할까?

바위가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 없이 홀로 존재하는 가능세계가 있을까? 불가능하다. 시간과 공간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러면 부분 하나하나는? 그것도 더 작은 부분으로 되어 있으니 불가능하다. 더 이상 부분이 없는 가장 작은 개체는? 그런 것은 없다. 물리적으로는 안 되더라도 최소한 수학적으로는 무한히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수학적으로도 나눌 수 없는 아비달마 유부의 다르마 같은 것이라면? 유부조차도 다르마가 인과에 매여 있다고 보았는데, 인과에 매인 것은 자성이 없이 공(空)하여 실체가 될 수 없다는 점은 나가르주나가 이미 증명했다. 결국 a 하나만 존재하는 세계는 불가능하다. 연기의 그물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 즉 실체는 없다.

한편 A가 a의 본질 또는 자성이라는 말은 ‘a는 a가 존재하는 모든 세계에서 A를 가진다’는 뜻이다. 어떤 경우에도 A가 a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위에서 a가 실체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는 a가 어떤 속성 A를 고정불변하게, 즉 자성으로 소유한다는 주장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한편 백보 양보해서 a가 실체여서 홀로 존재하는 가능세계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예를 들어, 자동차 엔진 하나만 존재하는 세계가 그런 것이다. 이 엔진에 본질 또는 자성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매질이 가진 화학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전환하는 기능’이다. 그런데 엔진 하나만 존재하는 세계에서 그것이 이 본질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까? 휘발유도, 산소도, 바퀴와 연결시켜주는 축도 없는데 어떻게 그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모든 사물도 마찬가지다.

가능세계의 개념을 도입해 보아도 연기의 그물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은 없다. 연기법은 가장 포괄적인 진리다. 그리고 그런 사물에 고정불변하게 존재하는 자성도 있을 수 없다. 역시 제법개공(諸法皆空)이다. 실체나 본질(자성)의 개념은 연기의 진리를 편리하게 잊어야만 언급할 수 있는 정직하지 못한 것들일 뿐이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69호 / 2021년 1월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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