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연재를 시작하면서 – 하
2. 연재를 시작하면서 – 하
  • 조성택 교수
  • 승인 2021.01.15 20:19
  • 호수 157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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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유관, 현대적인 부처님 서사로는 너무 올드하다”

깨달음 위해 세속 떠나는 싯다르타 모습이 불교 전통처럼 굳어져
엄밀히 말하면 ‘사문유관’은 붓다 되기 전 싯다르타의 고뇌 과정
세속은 떠나야 하는 곳이 아닌 부처님 가르침 행동하는 장소 돼야
부처님은 제자들을 향해 “세상에 대한 자비심으로 모든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 법을 설할 것”을 요청했다. 사르나트에서 첫 설법을 하시는 부처님 모습. 파키스탄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

지난 번 글에서 불교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이야기란 단편적인 일화가 아니라 인과관계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서사적 이야기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불교에도 서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잘 알려진 서사는 부처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부처님 탄생, 사문유관, 출가와 성도, 전법 그리고 열반에 이르는 일련의 이야기들은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대표 서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서사는 기원전 1세기 경 조성된 산치 대탑(Sanchi Stupa)의 조형물에도 표현돼 있어 상당히 이른 시기에 정착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서사가 너무 올드하다는 데 있습니다.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지 못한 채 소위 영혼 없는 복제만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최근 트로트가 우리 사회에서 큰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트로트가 그렇게 좋은 줄 몰랐다’고 들 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는 이유는 오래전 가수를 모창하는 게 아닌 현대 감성으로 새롭게 ‘재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삶에 관한 서사는 어떻습니까? 2000여년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그대로 지금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특별한 복고적 감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에겐 어떤 울림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사문유관’ 서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문유관은 싯다르타가 출가하게 되는 근본 동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불교 전통을 일관하는 핵심적 세계관이기도 합니다. 이 서사에 따르면 왕자로서 누리는 세속적 안락과 행복은 무상하므로 추구해야할 근본 가치가 되지 못합니다. 생·노·병·사라고 하는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서사는 그동안 싯다르타의 가출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버린 무책임한 행위가 아니라 위대한 버림(Great Renunciation)으로 이해돼 왔습니다. 그리하여 깨달음을 위해 세속을 떠나는 싯다르타의 결단은 모방을 통해 재현돼 왔고, 출가 그리고 전통이란 이름으로 제도화됐습니다. 이 제도는 2500여년 불교사를 통해 다양한 형태의 도전을 받아오긴 했으나 여전히 불교라는 종교의 핵심이자 불교를 제도적 종교로 유지하는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사문유관 서사와 짝을 이루는 교리는 고·집·멸·도 ‘사성제’입니다. 사성제는 고뇌하는 젊은 청년 싯다르타에서 깨달은 자가 되는 과정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성제의 첫 번째는 ‘모든 것은 고’[一切皆苦]라고 하는 통찰입니다. 이는 싯다르타가 출가 전 사문유관에서 목격했던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를 해결하고자 싯다르타는 출가했고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은 바, 그 결론이 바로 사성제였습니다.

물론 사문유관 서사를 통해서만 사성제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사성제는 불교 근본교리 그 자체로서 완결적인 내용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문유관이란 배경이 사성제 본래 의미를 제한하거나 곡해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문유관 서사와 사성제는 한 짝으로서 불교적 세계관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세속은 근본적으로 무상한 것이며, 고통의 현실이다” “벗어나야할 속박이며 ‘불 타는 집’[三界火宅]이다” “출가를 통한 해탈과 무지(無知)로부터의 깨달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세속의 일상에 대한 부정적 정서가 오늘날 사람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불교 전통에서 사문유관 서사가 차지하는 중요성과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불교를 대표할 수 있는 새로운 서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문유관은 붓다가 되기 이전의 싯다르타 구도 과정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깨달음 이후 붓다로서의 삶, 제도적 종교로서 불교의 시작을 전하는 서사는 ‘전법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면 관계상 전체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요지는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 대한 자비심으로 모든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길을 떠나 법을 설할 것”을 요청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는 불교가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집약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불교의 근본 목적은 고통받는 모든 생명의 안락과 행복의 실현입니다.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을 치유하고 안락과 행복을 실현하는 실천적 가르침입니다.

전법선언 취지와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부처님은 지금 같이 대웅전에서 눈을 지긋이 감고 앉아있는 분이 아니라 적극적인 행동가요 실천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경전에서는 부처님을 일컬어 ‘명행족’(明行足), 즉 지혜[明]와 실천[行]을 함께 갖추신 분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에게 지혜란 곧 실천이었습니다. 부처님은 당시 바라문이 추구하던 ‘세 가지 지혜’[三明]를 신랄히 비판했습니다. 그들이 추구했던 지혜는 실천 행위를 결한 일종의 지식이자 세계관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세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때 출가를 했지만 ‘뭇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세상으로 돌아왔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세속을 떠나라고 한 것은 세속의 그릇된 가치관과 집착을 떠나라고 한 것이지, 세속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버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귀영화에 대한 세속적인 관심을 버린 것이지, 세상과 사물에 대한 선악정사 판단과 실천을 버린 건 아니었습니다.

부처님은 늘 세상과 함께 살았습니다. ‘세속’은 떠나야 할 곳이 아니라 불교 가치를 실현해야 하는 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치의 중점과 지향은 바로 ‘뭇 생명의 안락과 행복’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 이 지면을 통해 여러분들과 함께 불교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자 합니다. 그 내용은 부처님, 부처님의 가르침,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우리 공동체에 관한 것들이 될 것입니다. 좋은 글을 위해 독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 특히 비판과 질정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570호 / 2021년 1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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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2 00:40:53
현대사회와 2600년 전 과는 다릅니다. 그 나라의 문화와 국민의식등 모든것이 변하고 있는 현시대, 글로벌시대! 오로지 자비와 안락을 위해 스님들에게만, 강요하고 지적하는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인연없는 중생은 구원할수없다. 하신바. 현대사람들의 고정관념 "스님은 이래야한다. " 이기적사고, 오래된 고정관념의 틀, 현대시대 대한민국 사람들은 높은학벌, 안정된 자금, 건강한체력에 열광합니다. 시대에 맞는 수행자가 되야하는 것이지, 멋있지도않고. 유능하지도 자본도없는, 그런것에 사람들은 행동하지도 따르지도 않습니다. 한국불교 한국스님들 멋진스님, 유능한스님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2600년전과 똑 같이 하라!! 어불성설입니다.

전상훈 2021-01-20 19:03:21
새로운 서사로서의불교를 위해 애쓰시는 조교수님의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지나다 2021-01-17 14:27:03
수행과 철학은 전혀 다른듯

공감 2021-01-16 12:32:45
산속에있는다고해서세속을벗어나는게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