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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제49칙 투자범성(投子凡聖)

범부와 성인은 터럭만큼도 차이가 없다

범부와 성인 거리 묻는 승에게
선상에서 내려와 우뚝 선 투자 
범부가 회광해 깨달음 이루면
범부와 성인 본래 하나 알게돼 

승이 투자에게 물었다. 범부와 성인의 거리는 어느 정도입니까. 투자가 선상에서 내려오더니 우뚝 섰다.

본 문답에서 제기된 범부와 성인의 거리에 대하여 시간과 공간과 심리적인 상황을 포함하고 있는 뜻으로 접근해야 한다. 범부는 깨치기 이전의 상태를 임시적으로 설정한 개념이고 성인은 깨친 이후의 상태로서 부처의 입장을 임시적으로 설정한 개념에 불과하다. 범부와 부처[성인]는 특별히 차이가 없다는 것은 번뇌가 보리라는 개념처럼 공의 입장에서 바라본 경우에 한정된다. 범부와 성인의 거리는 어느 정도인가를 묻고 있는 승의 경우에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주제이다. 그런데도 굳이 투자의청(1032~1083)에게 질문한 까닭은 곧 범부와 성인의 거리는 털끝만큼도 없다는 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 그렇다는 것인가를 다시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질문을 하였다. 그러한 질문에 투자는 선상에서 바로 내려와서 서 있는 모습으로 답변을 대신하였다.

승은 이 질문을 하기에 앞서 ‘어떤 것이 십신조어사(十身調御師)입니까’라는 질문을 했었다. 성인이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투자는 좌선하고 있던 평상에서 내려와 그 자리에 우뚝 선 제스처로 답변을 대신하였다. 두 가지 상이한 질문에 대하여 투자는 동일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십신조어사에 대한 질문은 성인의 측면에 대한 질문이었고, 범부와 성인의 거리에 대한 질문은 그 상관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이처럼 다른 상황에 대한 질문에도 투자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그것은 범부와 성인이라는 개념상의 차이를 초월하고 보면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인 것이다. 범부의 법을 구족하고 있지만 정작 범부인 당사자는 그런 도리를 전혀 모른다. 또한 성인의 법을 구족하고 있으면서도 성인인 당사자는 그런 도리에 대하여 전혀 티를 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약 성인이 성인의 법을 안다고 하면 그것은 곧 범부와 같아지고 만다. 자신이 깨친 법에 대하여 아직은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까닭에 진정한 불향상사(佛向上事)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범부가 자신이 범부인 줄을 알아차린다면 그것은 곧 성인과 같아지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범부가 아직 범부인 까닭은 깨침을 등지고 번뇌에 합치되며 자기에 미혹하고 외물을 추구하여 사소한 말에도 마음이 요동치고 얽매여서 항상 반연의 빌미가 되는 까닭에 실제로 목전에서 깨침의 이치를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부의 경우에는 깨침이 또 다른 망상의 경계가 되고 만다. 범부는 허송세월하며 데면데면하게 인생을 보내다가 혹시 일념만이라도 회광반조(廻光返照)하여 자신이 본래부터 성인과 동일한 이치를 갖추고 있는 줄을 원만하게 성취한다면 그로부터 애써 깨침을 얻으려는 수행은 필요가 없는 도리를 알아차리게 된다. 다만 이전까지의 분별식정이 아직은 남아있을지라도 선지식의 가르침을 통하여 일념에 깨친다면 반드시 옛적의 미혹한 범부의 상태를 초월하게 된다. 때문에 ‘원각경’에서 말한다. “마음은 본래 부처이다. 그러나 망념이 일어나면 물에 떠다니거나 가라앉고 만다. 언덕이 실제로는 이동하지 않지만 자신이 타고 있는 배가 항해함으로써 언덕이 달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투자는 자신이 질문한 승 앞에 우뚝 서 있는 모습으로 보여주었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한 도리로서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가 없는 모습이다. 범부와 성인의 차이는 분별적 개념을 벗어나서 보면 터럭 끝만큼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투자는 범부와 부처의 관계에 대하여 말한다. ‘곤륜산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다의 파도와 이어져 있고, 높은 하늘과 낮은 땅 사이에는 수풀과 산봉우리가 수려하다. 좌선하는 평상에서 잠시만 내려가도 구름과 산의 간격이 벌어지고, 범부다 부처다 하는 자취가 없으면 바다다 산봉우리다 하는 말조차 무색해진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70호 / 2021년 1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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