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 성문아라한

기자명 이제열

부처님 음성 직접 듣고 깨닫다

부처님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
비구들 의지처는 부처님 음성
콘단냐, 법문 듣고 깨친 아라한
설법 아니고는 깨닫기 어려워

불교에는 도를 닦는 방편과 목적에 따라 수행자를 셋으로 분류한다. 성문과 연각과 보살이 그것이다. 먼저 성문은 소리를 듣고 도를 깨친 사람이다. 여기서 소리는 부처님 설법을 의미한다. 연각은 일명 독각벽지불이라고도 하는데 부처님 설법을 듣지 않고 홀로 수행해 도를 깨친 사람이다. 연각은 십이연기를 깨쳤기 때문에 연각이라고 부른다.

보살은 모든 부처님이 실천한 육바라밀을 비롯한 갖가지 바라밀을 닦아 도를 깨친 사람이다. 대승경전에는 성문과 연각을 소승의 성자, 보살을 대승의 성자로 칭하며 소승에게 귀의하거나 그 가르침을 따르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대승불교권인 우리나라에도 나한전, 응진전, 독성각 등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 그들을 예배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들 가운데 소리와 연관된 게 성문이다. 본래 성문이란 팔리어 사바카(savaka)를 한역한 용어로 ‘듣는 자’ 또는 ‘제자’의 의미로 부처님의 사성제 설법을 듣고 도를 깨친 자를 가리킨다. 불교에서 최초 성문은 안냐 콘단냐(阿若憍陳如)라는 비구다. 콘단냐는 본래 부처님과 고행을 함께한 다섯 명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부처님은 성도 후 스스로 깨달으신 법을 누구에게 설할 것인지 사유하다 그 다섯 비구를 최초 설법대상으로 삼았다.

부처님이 맨 처음 설하신 내용은 중도다. 중도란 ‘양변을 벗어난 진리’라는 의미다.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다. 생멸중도, 고락중도, 거래중도, 자타중도, 유무중도 등 세상의 대립적 관계에 놓여있는 모든 것은 중도와 관련돼 있다. 부처님은 이러한 중도들 중 고락중도를 오비구에게 설하셨다.

“비구들이여 출가해 도를 닦는 수행자는 두 가지 극단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고통은 무의미하고 이익이 없는 것이며, 감각적 쾌락은 저속하고 성스럽지 못한 것이다.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얻게 하고,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렇다면 어떤 것이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얻게 하고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이른바 팔정도 즉,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관찰, 올바른 집중이다.”

부처님은 이 말씀과 함께 곧바로 사성제를 설하셨다. 사성제는 네 가지 괴로움과 관련한 성스러운 가르침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괴로움의 진리가 있다.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은 괴로움이며 사랑하는 자와의 이별, 미워하는 자와의 만남,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가 있다. 미혹한 생존의 과보를 일으키고 희열과 탐욕을 동반하고 모든 것에 집착을 일으키게 하는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괴로움을 소멸하는 진리가 있다. 갈애를 남김없이 소멸하고 버리고 벗어나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여기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길의 진리가 있다.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노력, 올바른 관찰, 올바른 집중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사성제는 중도의 진리다. 이 같은 가르침을 듣고 맨 처음 깨달음을 성취한 이가 콘단냐다. 그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 순간 부처님은 “콘단냐는 알았다. 콘단냐는 알았다”고 크게 기뻐하셨다. 콘단냐 이름 앞에 ‘알았다’는 의미의 ‘안냐’가 붙은 것은 부처님이 “콘다냐는 알았다”고 한데서 의해 붙여진 것이다.

콘단냐 다음으로 도를 깨달은 사람은 밥파, 밧디야, 마하나마다. 그 뒤로 앗사지가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됐다. 이로써 세상에는 최초로 다섯의 성문아라한이 출현한다. 아라한은 천상과 인간의 공양을 받는 자라하여 ‘응공(應供)’, 번뇌의 도적을 죽였다하여 ‘살적(殺賊)’,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하여 ‘불생(不生)’,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하여 ‘무학(無學)’의 의미로 해석한다. 눈여겨 볼 점은 콘단냐를 비롯한 다섯 수행자가 아라한이 된 것은 오랜 선정이나 수행을 통해 이룬 게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의 의지처는 부처님 음성이었다. 즉 설법 아니고는 선정과 수행을 깊이 닦더라도 도를 이룰 수 없다. 깨달음은 견해의 대전환이며 사고의 혁신이다. 평생 앉아 선정에 들어도 인생의 답을 찾기는 어렵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570호 / 2021년 1월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