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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사 주지 등운 스님

“100일 용맹정진 정신 굳건히 이어 고운사 가풍 확립할 터”

미술전공·대불련 활동
근일 스님 은사로 출가

“화두 잃고 일 하면 일꾼”
총무 보면서도 가행정진

도반 70일 간호하다 ‘병’
“칠불사 3년결사 아쉬워” 

한 철 정진 수좌 삶 지탱
고금당 선원 후원에 최선

일부 전각·요사채 개조
천년숲길·템플스테이 활성

풍력단지 건설 결사반대
수행·자연환경 훼손 자명

한 치 오차 없는 인과
그 무거움 뼈에 새겨야

오욕 향한 시선 거두고
상생 인연 지어야 행복

고운사 주지 등운 스님은 “내 옆의 사람을 이익되게 하는 인(因)이면 진행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인(因)이면 멈춰야 한다”고 전했다.

고요했던 고운사에 선풍(禪風)이 휘몰아 쳤다.(1980) 

통도사 극락선원, 묘관음사 길상선원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해 온 현봉근일(玄峰勤日) 스님(현 고운사 조실)이 주석하며 승가는 물론 재가불자들에게도 참선의 길을 열어 보였는데, 월말이면 어김없이 참선법회를 열어 철야정진으로 이끌었다. 안동대 미술학과에 입학(1979)해 불교학생회에 가입한 청년은 2학년 때 고운사를 찾아 큰스님을 처음 친견했다. 선기 충만한 세납 40대의 근일 스님 위모(威貌)는 고산 속 설원을 활보하는 호랑이를 보는 듯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이뭣고’ 화두를 받고는 곧바로 철야정진에 돌입했고, 그것은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1985년 2월 대학 졸업과 함께 자연스레 출가를 결심했다. 숙연이었을 터다. 그해 3월 가야산 홍류동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오랜 객지생활 하다 고향 집 찾아가는 길 같았다. 동양미술을 전공하며 무수히 보고 그려왔던 동양화 속으로 걸어들어 간 청년은 그 길 끝에 앉아 있는 해인사에서 삭발염의 했다. 은사는 근일 스님과 맺었다. 은사스님은 구름을 타고 올라간다는 뜻의 등운(騰雲)이라는 법명을 내렸다. 고운사를 감싸 안은 등운산(騰雲山)의 그 등운이다. 

해인사에서 4개월의 행자생활을 지낸 후 고운사로 돌아와 2개월의 행자기간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았다. 그해 동안거에 맞춰 근일 스님은 서산, 사명, 전강 스님 등 선지식의 숨결이 배인 고금당(古金堂) 선원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다. ‘100일 용맹정진’의 기치를 내건 것이다. 공양과 포행 외 모든 시간을 정진에 쏟아부어야 했기에 누워서 자는 잠은 용납되지 않았다. ‘100일 철야정진’인 셈인데 안거 한 철을 통째로 용맹정진으로 매진하는 건 근현대 선원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 소식을 들은 수좌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등운 스님도 입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총무와 사무를 보던 스님들이 절을 떠났다. 누군가는 그 자리를 대신해야 했다. 은사스님이 찾았다. 

“총무가 절을 떠났는데 어찌하노?”

고운사 조실 근일 스님은 예나 지금이나 누구에게도 무엇을 ‘맡아라!’ 명하지 않고 항상 ‘어떻게 하냐!’고 에둘러 표현한다. “낮에는 총무 소임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저녁에는 고금당에서 정진하겠습니다. 선원 대중의 허락을 받아주십시오!”

절의 살림살이만 돌보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산에서 나무 해 와 아궁이에 불 때는 일, 읍내에 나가 장 봐오는 일, 채소 가꾸고 다듬는 일도 등운 스님 몫이었다. 가부좌 틀어본들 졸기 일쑤였다. 이제 막 사미계 받고 입은 풀 잘 먹여진 승복은 고개를 떨궜다 드는 동작을 할 때마다 ‘스슥’하는 소리를 냈다. 적요한 공간 속을 가르는 그 소리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입승을 보던 지환(조계종 전 기본선원장) 스님이 “제발 숙소로 돌아가서 자라!” 일렀을 정도였다. 총무 등운 스님은 수좌들과 함께 그 ‘100일 용맹정진’을 회향했다. 근일 스님이 부석사로 주석처를 옮기기 전까지 ‘100일 용맹정진’은 7년 동안 지속됐다.

비구계 받은 등운 스님은 1988년 고운사를 떠나 제방선원에서 수행하고자 동안거 때 길을 떠났고, 걸음은 불국사 선원에 닿았다. 당시 선원장이자 불국사 조실이었던 월산 스님이 물었다.

“어디서 왔는가?”
“고금당 선원에서 왔습니다.”

잠시 후 월산 스님은 지폐 몇 장을 건네며 전했다. 

“택시 타고 돌아가시게! 돌아다니지 말고.” 

‘근일’이라는 거목 아래서 매진하라는 뜻일 터였다. 그 의미를 새기고도 남았지만 하늘의 구름처럼 자유롭게 길을 걷다 인연 닿는 선원에서 정진하고 싶은 열정을 놓을 수 없었다. 성철 스님의 해인사, 청화 스님의 태안사, 진제 스님의 해운정사, 서옹 스님의 백양사에서 화두를 들었다. 지리산 칠불사 운상선원에 이르러서는 수좌 20명과 함께 ‘3년 결사’에 들어갔다.(1991)  결사 2년쯤 지났을 때 도반 한 명이 아팠는데 열이 41도까지 올랐다. 그와 포행하며 나눈 담소가 떠올랐다. 서울공대 출신의 그 스님은 ‘민주화 운동’과 연관돼 곤욕을 치르고 입산한 수좌였는데 어릴 때 심장수술을 받은 경력이 있었다. 병원으로 옮기고는 꼬박 70일 동안 곁을 지키며 간병했다. 도반은 병을 다스리고 퇴원했다. 

그때 사달이 났다. 정작 간병한 등운 스님이 칠불사에서 쓰러진 것이다. 한 달 동안 통원치료를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대중에게 피해주는 것만 같아 고민 끝에 결사를 포기하고 고운사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6개월 동안 설사 등에 시달리며 앓았는데 60kg에 이르렀던 몸무게는 45kg까지 내려가며 뼈만 남겨졌다. 그 이름 모를 병은 당시 은사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부석사로 가서야 다스릴 수 있었다. 

부다가야 성지서 한 철을 정진했다.

해제철에도 설악산 봉정암 등에서 기도하며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등운 스님은 이국땅으로의 만행도 단행했다. 티베트 카일라스(수미산)를 마주한 후 파키스탄으로 걸음했는데, 그때 ‘9·11 테러’가 발생했다. 그 와중에도 이슬라마바드박물관의 ‘하얀 부처님’과 라호르박물관의 ‘고행상’을 친견했다. 인도 부다가야 성지에 닿은 등운 스님은 그 자리서 한 철을 정진했고, 엄격하기로 정평난 참매선원으로까지 이어졌다. 

운수행각은 미얀마 참매선원으로도 이어졌다.

2002년 어느 날 은사스님이 찾았다. “대구 삼보사 주지가 떠났는데 어떻게 하노!”

큰스님의 의중을 모를 리 없다. 

“제가 맡겠습니다.” 

출가 후 처음으로 주지 소임을 본 등운 스님은 이후 서악사와 연미사에 머무르며 포교에 진력했고 2020년 9월 고운사 주지에 선출됐다. 

한때 가장 큰 암자였을까? 등운 스님이 머물고 있는 곳에 ‘고운대암(孤雲大庵)’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주련이 인상적이다.

‘고운대암 가까이한 지 100년(孤雲大庵逼百年)/ 고락 다한 가운데 오래 살아왔네 (苦樂盡裏壽萬境)./ 풍광, 현상 무상히 흘러가는데(風光現影歷無常)/ 태평한 큰 성품으로 해탈을 이루었네(太平性海成解脫).’
사미 때 총무 소임을 보며 정진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니 꽤나 힘겨웠을 터다. 은사스님의 격려가 있을 법했다.

“그냥 놔두는 법이 없으셨습니다. 밭 매느라 여념 없는 저에게 갑자기 오셔서는 큰 소리로 ‘일러라!’ 하십니다. 어느 날,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붙은 저에게 한 말씀 하셨습니다. ‘화두 들고 일하면 수좌고, 일한다고 화두 놓치면 일꾼이다.’ 정중(靜中) 공부 못지않게 동중(動中) 공부의 지중함을 일깨워주셨던 그 말씀이 돌이켜보면 가장 소중하고도 큰 격려이자 가르침이었습니다.”

다소 가라앉은 고금당 선원의 선풍을 진작시키겠다는 원력도 세웠다. 

“전력을 다한 한 철의 정진이 한 평생 수좌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인연에 따라서는 그 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그 무엇을 체득 할 수도 있습니다. 올해 동안거에는 10명의 수좌스님들이 좌복 위에 앉으셨습니다. 미력이라도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 하려 합니다.”

코로나19로 주춤하고 있지만 템플스테이를 활성화하는데 역점을 두겠다는 계획도 전했다.

“휴식(休息)은 파자를 통해 알 수 있듯, 사람(人)이 나무(木) 곁에서 자신(自)의 마음(心)을 보는 것입니다. 좋은 일 있다고 하여 기쁨에 너무 도취돼 있는 건 아닌지, 실패한 일 있다고 하여 절망으로 치닫고 있는 건 아닌지를 잠깐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한 쪽으로 치우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습니다. 고운사 산문에서부터 도량까지 1.4km 천년숲길은 등운산과 고운사가 천년동안 빚어낸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우거져 있고 그 길 따라 길게 난 계곡은 우리에게 늘 청량감을 선사합니다. 이 길을 걸으며 진정한 휴식을 취해 보기를 권합니다. 코로나19 여파로 힘겨워 하는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도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지금의 화엄문화템플관만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본 등운 스님은 형편 닿는 대로 전각과 요사채도 손볼 참이다. 세 개의 방이 있다면 한 개의 방을 욕실로 바꾸는 식의 리모델링이다. 

“운수암에서 듣는 저녁 종소리, 백련암에서 보는 가을의 달, 가운루에서 마주하는 바람 등은 대웅전 지척에서도 보고 느낄 수 있는 절경이요 정취입니다. 이 풍광에 젖어들다보면 무상·무아에도 닿으리라 봅니다.”

고운사 천년숲길은 청량하면서도 그윽하다.

고운사 천년숲길은 ‘2020년 경북관광 100선’에 선정될 만큼 아름다운 길이다. 그런데 그 길과 고운사 주변의 단촌면 일대에 풍력발전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이미 명부전 뒤편 산자락에 풍력발전단지 건설 조사용 첨탑이 서 있는 상황이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10개의 풍력발전소가 고운사를 에워쌀 것이라고 한다. 풍력발전단지 조성 반대 의사를 천명한 40개의 현수막을 고운사 인근 지역에 걸어 둔 상태다.

“1000년 동안 지역민의 종교적 귀의처 역할을 담당해 온 고운사는 지금도 의성을 찾는 수많은 국민들에게 힐링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천년고찰의 귀중함을 망각한 채 직선거리 500m거리에 풍력발전단지를 건설한다는 발상 자체가 잘못됐습니다. 수행환경 훼손은 자명하고 문화재 피해마저 심히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재생 에너지’ 미명 아래 무너져야 할 산사는 결코 아닙니다. 또한 고운사 주변은 생태적으로 우수하고 보전 가치가 뛰어난 산림보호지역이자 식물보호구역입니다. 풍력발전의 특성상 불가피하게 발생 되는 소음과 저주파는 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아온 주민들에게도 심각한 피해를 줄 건 자명합니다.”

조계종 총무원, 전문가와의 협의를 통해 구체적인 대응방안까지 설정해 놓은 상황이라고 한다.

고운사 주지로서, 전국의 제방선원에서 정진한 수좌로서 사부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청했다. 등운 스님은 인과만큼은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과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발현됩니다. 내 옆의 사람을 이익되게 하는 인(因)이면 진행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인(因)이면 멈춰야 합니다. 나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행복에 이르게 하는 최선의 묘책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단지 바라보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재물, 색, 음식, 명예, 수면 등의 오욕(五欲)에 물들고 집착하면 해를 입기 마련입니다. 오욕으로 향한 시선을 내 안으로 돌리려 애쓰며, 타인을 고통에 몰아넣는 언행은 삼가해야 할 것입니다. 이 또한 나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인과를 무섭게 알고 오욕을 놓으려는 그 마음이 고운대암 주련이 설파한 ‘태평한 큰 성품’일 것이다. 가운루에서 불어온 바람이 산사를 휘돈다. 맥동하는 고운사가 느껴진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등운 스님은
근일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85년 9월 범어사에서 사미계를, 1988년 9월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고운사, 부석사, 해인사, 해운정사, 백양사, 송광사, 칠불사 등 선원에서 17안거를 성만했다. 삼보사·서악사 주지, 중앙선거관리위원, 15·16·17대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다.

 

[1571호 / 2021년 1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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