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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승가대 전 총장 종범 스님

“분별하고 집착하는 마음 내려놓으면 여래를 보게 됩니다” 

매 순간 성불하고 있음에도 알지 못하는 것은 분별의식 때문
수행을 대단하게 여기지만 있는 그대로 알아가는 과정일 뿐 
‘화엄경’ 공부는 경문을 바로 이해해 여래를 보기 위한 목적

오늘 법문 주제는 ‘대방광불화엄경’ 39품 80권 중에서 ‘여래출현품’ 제37이고 권차는 제50~52권으로 1품 3권의 경문입니다.

“이때 세존께서 미간 백호상으로부터 대광명을 뿜어내어 비추시니 이름이 여래출현이라. 그 광명이 허공법계 일체 세계를 널리 한 곳도 빼놓는 곳 없이 비추어서 오른쪽으로 열 바퀴를 돌고 여래의 무량 자재를 나타내며 한량없는 보살대중을 깨우쳤느니라.”

‘여래출현품’에서는 방광이 두 번 나오는데 한 번은 미간백호상 광명이고 한 번은 구중광명, 입안에서 하는 광명입니다. “여래방광이 시방법계를 널리 다 비추고 열 바퀴를 돈다”는 것은 어느 곳이든지 여래 광명이 비추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책상에도 여래광명이 비추고 이 경전에도 비추고 여러분의 모든 몸에 다 비추고 화면으로 참가하는 모든 대중에게 다 비추어서 광명이 없는 곳 없이 다 비춥니다. 광명은 무슨 일을 하는가, 여래와 다른 생각을 하는 그런 생각들을 그 광명으로 다 없앱니다. 

여래는 한 가지, 두 가지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무량법, 한량없는 법으로 출현하신다고 했습니다. 화엄이라는 것은 인행과 과덕이 원만 구족한 상태입니다. 인행이 있으면 과덕이 있고 과덕이 있으면 인행이 있어서 그 무량법 하나하나가 전부 여래 출현이 됩니다. 이것을 화엄의 총별(總別) 원융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총은 십이고 별은 하나인데 열이라고 하는 숫자에는 반드시 그 하나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열을 볼 때는 하나하나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하나를 볼 때는 열이 안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를 떠난 열이 없고 열을 떠난 하나가 없다, 이것이 총과 별이 원만구족, 원융무애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래가 출현하는 것은 무량한 인연으로 출현하는 것이지 한, 두 가지 인연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언제 성불을 하는가라고 하는데 지금 순간순간 성불하는 것입니다. 화엄법문 듣는 이 순간에 성불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지만 하나를 볼 때는 열이 안보이듯이 지금 성불하고 있는 것을 모릅니다. 그것이 화엄입니다. 그것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사람과 꿈을 깬 사람이 같은 방에 누워 있는데, 꿈꾸는 사람은 꿈꾸는 동안 자신이 편안한 방에 있다는 걸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꿈을 깨고 나서야 압니다.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방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있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수행은 남의 집에 가서 머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또 수행은 맨땅을 파는 것이 아닙니다. 수행은 즐거운 것이고, 수행은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행한다고 하니까 엄청난 것을 하는 것 같고 대단한 것 같다고 하는데 대단할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 방에 있는 것을 꿈꾸다가도 자기 방 그대로 아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일체 국토, 일체 중생, 일체 처소에서 전부 여래신을 봅니다. 여기 경탁 위 물잔이라는 그릇이 상입니다. 이것을 의식으로 분별하면 그릇입니다. 이 그릇에는 자성이 없습니다. 지혜로 보면 그릇은 없고 여래신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못 보는가. 그것을 의식으로, 상으로 분별하고 거기서 집착하니까 모르는 것입니다. 얼음과 물이 있는데 얼음이 물인 겁니다. 얼음이라고만 보면 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이 보이지 않아도 물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래신을 그렇게 본다는 것입니다. 

화엄산림 기간인 만큼 ‘화엄경’, 이 경을 보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옛날에는 ‘화엄경’을 공부하려면 전부 소초(疏鈔)를 갖고 공부를 했습니다. 1960년대 사찰 강원에서는 목판으로 찍은 고서로 공부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영인본이 나왔습니다. 원본은 비싸서 사지 못하고 영인본으로 공부했습니다. 그 이후로 한글대장경이 나왔습니다. 

경에는 경문(經文)이 있고 경의(經意)가 있고 경지(經志)가 있습니다. ‘화엄경’은 80권입니다. 경문만 해석하는 것을 문해간경(文解看經)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든다면, ‘십주품’에서 여래십력(如來十力)을 이야기하는데, 처(處), 비처(非處)라고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해석이 전부 다릅니다. 그런데 어떤 해석이 옳은 것인가, 경문에 있는 것으로 아는 게 옳은 것입니다. 사전에 나와 있는 설명이 아니라 경문에 의해서 경문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옳습니다. 

‘십주품’ 게송에는 “삼세인과명위처(三世因果名為處), 아등자성위비처(我等自性為非處)”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처(處)를 아는 지혜는 삼세인과를 아는 지혜입니다. 이것이 옳은 해석입니다. 또 비처(非處)를 아는 지혜는 우리 자성을 아는 지혜입니다. 이렇게 경문에 의해서 경문을 이해하는 것이 ‘문해간경’의 옳은 태도입니다. 

그다음 의해간경(意解看經)이 있습니다. ‘의해간경은 경의 뜻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런데 해석이 전부 다릅니다. 예를 들면 의상 스님은 ‘화엄경’의 경문을 전혀 해석하지 않으셨습니다. ‘화엄경’과 ‘십지경론’을 종합적으로 모아서 ‘일승법계도합시일인’이라 했고, 그 내용은 ‘원교종요(圓敎宗要)’라고 했습니다. 종(宗)이라는 건 뿌리와 같다는 것이고 요(要)라는 것은 줄기입니다. 이것이 의상 스님이 펼친 의해입니다. 다른 경문 자체는 전혀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중국 청량 법사는 ‘대방광불화엄경’ 일곱 글자를 한 자 한 자에 각기 열 가지 뜻을 담아 총 70가지 의미로 설명하셨습니다. 고려 말 순지 스님은 “대방광은 비로자나, 불은 문수보살, 화엄은 보현보살”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화엄사기’를 보면 “대방광은 체와 용이다. 대는 체이고 방광은 용이다. 불화엄은 인과다. 불은 과이고 화엄은 인이다”고 설명하는 것이 ‘의해간경’입니다. 

경지(經志)는 견불간경(見佛看經)입니다. 경이라고 하는 것을 등불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등불은 등인(燈人), 등불을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등을 들려면 등체(燈體)가 있습니다. 등의 몸체입니다. 등체에서는 등광(燈光)이 비칩니다. 그런데 등은 그걸 들고 다니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뭔가 중요한 걸 보려고 등불을 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을 등조(燈照)라고 합니다. 등이 비추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등조가 무엇을 말하는가, 어둠 속에 있는 보물을 보는 것입니다. 등불을 통해서 어둠 속의 보물을 본다는 것은 곧 경전 속에 들어있는 경지(經志)를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경을 보는 자세입니다. 경을 외우고 경만 보다가 끝내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경을 통해 경지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범행품’에서는 여러 가지 관법을 이야기합니다. 관법이 깊어지면 “지일체법 즉심자성 성취혜신 부유타오(知一切法 即心自性 成就慧身 不由他悟)”라, 일체 법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관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다음 혜신(慧身)을 성취하는 것, 이것은 깨달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관(觀)을 통해서 다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관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야마궁중게찬품’에 보면 “약능견불신(若能見佛身) 청정여법성(淸淨如法性), 만약 불신이 청정하기가 법성과 같음을 본다면”, 이 말은 법성을 보면 불신을 본다는 겁니다. 또, “차인어불법(此人於佛法) 일절무의혹(一切無疑惑),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이 사람은 불법에 의혹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관행 공부를 해서 마음의 번뇌 망상이 밝아지기 전에는 의혹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관행이 없으면 의심은 떨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경지를 깨닫는 방법이고 ‘견불간경’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경전을 보는 방법은 문해간경, 의해간경, 견불간경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견불은 곧 관행으로 경지를 보는 것입니다. ‘야마궁중게찬품’에 있는 경문을 한 구절 더 소개하겠습니다. “약견일체법(若見一切法) 본성여열반(本性如涅槃)” “일체법의 본성이 대열반과 똑같다”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제가 들고 있는 이 그릇은 형상입니다. 이 상의 법성, 본성이 대열반입니다. 물이 얼음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즉견여래(是則見如來) 구경무소주(究竟無所住)’라, “법성에서 대열반을 보면 여래가 구경에는 머무는 데가 없다”고 합니다. “무소주(無所住)를 본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화엄경’ 공부는 관행만 하는 것도 아니고, 경문도 이해하고 뜻도 이해하되 마지막으로 여래를 보는 견불을 하는 것입니다. ‘여래출현품’ 마지막 부분에 ‘견문공양제여래(見聞供養諸如來) 소득공덕불가량(所得功德不可量)’라는 게송은 “부처님을 형상불이라도 보고 명호라도 듣고 공양을 올리면 그 얻는 공덕이 한량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염불문입니다. 염불문에서는 제일 처음 하는 것이 공불(供佛)입니다. 그다음에 예경하는 예불(禮佛)이고, 그다음이 항상 생각하는 염불(念佛)입니다. 이런 행이 자꾸 깊어져서 더 들어가면 견불(見佛), 부처를 봅니다. 초지보살(初地菩薩)이 되면 견불합니다. 견불이 되면 그다음에는 불(佛)에 머무는 주불, 그다음에는 마지막 현불이고 현불이 곧 방광입니다. 길이 이렇게 모두 정해져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간경 공부도 길을 잘 따라가야 합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1월8일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봉행된 ‘화엄산림대법회’ 25차 법회에서 종범 스님이 ‘여래출현품’을 주제로 설한 내용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1571호 / 2021년 1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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