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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산대사의 닭울음소리

비로자나 화엄설법이자 임제의 할

마을 지나다 닭울음 듣고 오도
소리는 은산철벽 부수는 기연
법문도 지옥중생에겐 울부짖음
새소리도 극락중생에겐 법음

동양철학에 조예가 깊은 모 학자 분의 설명에 의하면 똑같은 소리를 두고 짐승은 자신을 위협하는 소리로 알아듣고, 사람은 뜻을 헤아리는 소리로 알아듣고, 성인은 도의 소리로 알아듣는 다고 한다. 가령 산 속에서 북을 울리면 뭇 짐승들은 자기를 잡으러 오거나 해치려는 소리일지 모른다고 경계를 한다. 사람들은 귀에 익은 소리라고 생각하여 듣고 그냥 흘려버린다. 반면 성인은 천지만물이 그대로 도인줄 알아 북소리 속에서도 도를 본다.

그래서인지 선가에는 소리를 듣고 도를 깨쳤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종소리를 듣거나,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듣거나, 기왓장 깨지는 소리를 듣거나, 어린아이 울음소리 듣고 도를 깨치기도 한다. 도를 깨닫는데 불경의 경구나 스승의 설법이 아닌 일상의 소리에 의지해서 깨닫는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하기만 하다. 조선중기의 고승이신 휴정 서산대사도 소리를 듣고 도를 깨치신 분이다. 대사께서 어느 날 한낮에 지금의 구례읍인 봉성을 지나던 중 마을에서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닭 울음소리가 대사의 마음에 전광석화처럼 파고들었다. 다음은 대사께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 도를 깨친 후 읊었다는 오도송 내용이다.

‘머리는 희어도 마음은 희지 않나니(髮白非心白)/ 옛사람이 이미 누설한 것이라(古人曾漏洩)./이제 한 마디 닭 울음소리를 듣고서(今聽一聲鷄)/ 장부가 해야 할 일 마침내 끝냈도다(丈夫能事畢)./ 문득 나의 집을 이제야 얻으니(忽得自家底)/ 모든 만물이 다만 이렇고 이렇도다(頭頭只此爾)./ 보배로운 수많은 대장경들이(萬千金寶藏)/ 원래는 한 장의 빈종이로다(元是一空紙).’

선사들의 게송은 언제 읽어도 깔끔하다. 구름 걷힌 푸른 하늘처럼 군더더기가 달라붙지 않는다. 불립문자 격외 도리에서 나온 게송인지라 경전의 용어도 사용되지 않는다. 과거 고인들의 언구를 끌어다 자신의 경지를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펄펄 살아있는 언어인 것이다. 당시 선사에게 들리던 닭 울음소리는 그냥 닭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비로자나불의 화엄설법이며 임제의 할이었다.

선사는 간화선 수행자이다. 간화선은 극한의 삼매를 요구한다. 모기의 침으로 무쇠소의 몸을 뚫을 수 없듯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자에게는 마음에 화두 하나만 성성할 뿐 그 밖의 다른 경계는 들어오거나 일으켜서는 안 된다. 마음에 화두만 꽉 차 마치 큰 풍선을 불고불어 더 이상 공기가 들어 갈 공간이 없게 하는 것과 같다. 선가에서는 이를 은산철벽의 경계라 한다. 마치 넘으려 해야 넘을 수 없는 은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산과 마주친 것처럼, 사방이 무쇠로 만들어진 두꺼운 벽 앞에 선 것처럼, 화두 하나만 하늘과 땅이 되어 떡 버티고 서있을 뿐이다. 이 앞에서는 부처도 소용없고 조사도 필요 없다. 도를 구하거나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도 용납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몽땅 화두가 잡아먹어 손을 쓰고 싶어도 손을 쓸 길이 없다. 바로 이러한 때에 이르러 은산을 무너뜨리고 철벽을 뚫는 기연이 나타난다. 곧 소리인 것이다. 그동안 일상에서 늘 들어왔던 소리가 천지를 개벽시킨다.

선사의 무심에서 나온 대법문에 사족을 그린다. 변하는 것은 몸이니 본래면목으로서의 부처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이는 과거의 모든 스승들이 이미 한결같이 밝혔음이다. 닭 울음소리에 도를 깨치니 이제 해야 할 일이 없다. 홀연히 내 안의 집에 돌아오니 부처가 다른 사람이 아니다. 세상 만물 하나하나가 또한 이와 같으니, 마음과 도와 부처와 만물은 차별이 없다. 과거 부처님이 설하신 팔만 사천의 대장경이 본래는 백지 같은 청정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참된 경전은 문자에 있음이 아니다.

소리는 그냥 소리이다. 소리는 듣는 이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 듣는 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부처님 말씀도 지옥중생이 들으면 아비규환의 울부짖음이 되고 극락중생에게는 새소리도 아미타불의 설법이 된다.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귀가 필요하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571호 / 2021년 1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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