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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연기법을 거스르는 주장과 증명의 책임

“불성·본각사상은 붓다 가르침과 정면 배치”

불성·본각, 창조적인 재해석 없으면 연기와 공에 어긋나
‘참나’도 붓다의 무아 가르침을 거스르는 비불교적 주장
‘깨쳐야만 안다’는 등 방식 논증은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으며,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

붓다가 성도(成道) 당시 음미하고 있었다는 이 연기법(緣起法)은 접할 때마다 그 가르침의 깊이에 새롭게 놀라게 된다. 연기는 대승(大乘)에 이르러 단순한 인과(因果, causation)를 넘어 관계(關係, relation) 일반으로까지 확대 해석된다. 대다수 불자에게 연기는 존재세계를 가장 근본적으로 그리고 가장 포괄적으로 품는 진리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붓다의 성도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붓다의 성도를 가능케 한 연기법으로부터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겠다. 연기란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한다는 붓다의 통찰이다. 모든 것이 조건에 의존해서(緣) 존재하게 되기(起) 때문에, 아무 것도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實體)가 될 수 없다. 스스로 존재하지도 못하니 스스로의 독립적인 본성, 즉 자성(自性)을 가질 수도 없다. 그래서 만물이 자성을 결여한다는 의미에서 만물은 공(空)하다[제법개공(諸法皆空)].

어떤 사물도 스스로의 본성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여 그대로 머물러 있지 못하고 무상(無常)하다. 수많은 조건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만물이 생멸한다는 통찰이 연기인데, 어느 찰나에도 한 사물을 구성하는 수많은 조건 가운에 몇몇이라도 이합집산하기 마련이니, 어떤 것도 불변할 수 없다. 그래서 불변의 본성을 가진 나 또는 개인 인격체가 존재할 리 만무하다[무아(無我)]. 이 진리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 그대로 적용된다[제법무아(諸法無我)].

나는 연기와 공 그리고 무상과 무아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어떤 주장도 붓다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런 주장은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요즈음은 좀 뜸한 것 같지만, 한 동안 유행하던 ‘참나’ 이야기는 붓다의 무아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주장인데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오랫동안 인기 있던 주제였다. 기본적인 이치를 따져가며 이 문제를 한번 헤아려 보자.

힌두교의 아뜨만이나 서양종교의 영혼과 같은 고정불변의 참나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조건에 의해 생멸하지 않는, 다시 말해 붓다의 연기법이 포착하지 못하는 어떤 굉장한 자성을 가진 실체이다. 만약 그런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만물의 연기를 통찰함으로써 깨달은 붓다의 성도가 완전하지 못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붓다의 깨달음이 참나를 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나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불제자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붓다보다 오히려 더 위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나의 존재는 먼저 그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증명해야 할 의무(burden of proof)가 있다. 만물이 연기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소립자 물리학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어김없이 또 끊임없이 확인되고 있지만, 아뜨만이나 영혼과 같은 참나는 소위 ‘신앙’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어야만 볼 수 있다’거나 ‘깨쳐야만 그 존재를 안다’는 식의 논증은 전형적인 논리적 오류다. 왜냐하면 영혼이나 참나의 존재를 주장하는 사람이 그것을 증명할 의무가 있지, 회의하는 사람에게 그 존재의 증명 부담을 지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증명의 부담을 질문자에게 부과하는 일은 논리적으로 오류일 뿐만 아니라 예의에도 어긋난다.

유식론을 연구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범아일여(梵我一如)조차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바라문교와 힌두교의 최고 진리라는 범아일여가  어떻게 불교의 가르침으로 둔갑했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서양종교의 신과 영혼에 비유될 수 있는 범(梵, 브라만)과 아(我, 아뜨만)가 동일하다는 주장이 범아일여인데, 처음부터 그런 신과 영혼(참나)의 존재를 부정하고 교단을 성립한 붓다가 들으시면 어찌 생각하실지 부끄럽기만 하다. 이 문제도 기본 이치부터 따져가며 헤아려 보아야 한다.

절대신이나 브라만(그리고 영혼이나 아뜨만)은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하지 않는다. 이들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연기법 밖에 있다. 그들은 무시(無始)로부터 불변불멸하며 존재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영원히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질문해 보자. 그런 존재자가 과연 있을까? 어느 누구 한 사람이라도 소위 ‘믿음’ 말고 현대인 대다수가 수긍하는 이치에 맞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절대신이나 브라만의 존재를 성공적으로 증명한 적이 있었던가? ‘믿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식으로 그 존재의 증명을 질문자에게 부담지우면 안 된다. 증명의 책임은 그런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에게 있다.

한편 ‘열반경’뿐만 아니라 내가 애독하는 ‘법화경’과 ‘화엄경’에서도 펼쳐지는 불성(佛性)과 본각(本覺)사상 또한 바라문교의 아뜨만이론(아론我論)이라는 비판이 있다. 나는 불성과 본각의 개념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해서 연기와 공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보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한 불성 및 본각사상은 붓다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 이유도 기본 이치를 헤아려 보면 알게 된다.

만물에 내재한다는 불성은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하지 않고 고정불변하다. 불성이 있다면 그것은 연기법 밖에 있다. 그래서 그 존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편 불성의 존재를 바탕으로 한 본각사상은 모두에게 연기하지 않고 변치 않는 ‘본래 깨달음’이라는 자성이 있다는 말이어서 공(空)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공적영지(空寂靈知)에서도 ‘공적’까지는 좋으나 ‘영지’의 존재는 결국 어떤 고정불변의 굉장한 자성이 있다는 뜻이어서 받아들이기가 다시금 곤란하다. 유구한 선문(禪門)의 전통이 상당 부분 불성 및 본각사상에 입각해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런 주장들에 대한 재해석이 시급하다.

불성과 본각의 존재를 의심하며 명상을 통한 깨침의 가능성에 회의하는 질문자에게 흔히 하는 말들이 있다. ‘불성은 깨친 자만이 그 존재를 안다’ ‘바닷물의 짠 맛을 글로는 설명할 수 없고 직접 마셔봐야 안다’ ‘일 주일만 참선해 보라, 그러면 안다’ ‘알음알이로는 깨칠 수 없으니 잔말 말고 참선하라’ 등등··· 우리가 귀가 따갑게 들어오던 이 모든 말은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증명의 부담을 질문자에게 떠넘기는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71호 / 2021년 1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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