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떠나보는 것도 괜찮다. 그 곳에 무엇이 좋기 때문에. ‘누가 있다고 하기에’라는 이유를 붙이지 말고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목적도 달지 말고 길을 나서 보는 것이다.
버스가 달리다 종점에 서면 그 곳에는 절이 있고 절로 들어가면 바람 결에 풍경이 댕그렁거리며 기다린다. 대웅전 뒤 매화나무 가지에 겨울산새가 앉아 매화 피기를 기다리고 오후햇살에 오층석탑 그림자가 길어지는 산사를 바라보면 추워도 춥지 않다.
“들어와 차 한 잔 하고 가요” 하는 스님의 짧은 말씀은 고스란히 법문이 돼 풍경과 함께 바래지 않는 추억이 된다.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어설픈 나에게는 늘 사람들의 시선이 한 번 더 오곤 한다. 어느 곳에서든 나를 바라보는 누군가는 질문을 던진다.
“힘들죠?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요?”
나의 대답도 비슷하다.
“그냥 여기 오는 길 즐겁습니다. 어떤 이유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부처님이 있으니 온 것이지요. 서로가 아무런 시비 없이 존재하고 있는 곳의 일부분이 되는 일입니다.”
더 이상 좋은 대답은 없는 듯하다.
무슨 이유로 그리 되었느냐고 할 것도 없고, 언제부터 그 모습이냐고 물을 것도 아니다.
수증기거나 구름과 비, 눈, 우박의 근원은 물이다. 어느 모습 하나 물이 아니라고 규정할 순 없다. 사람 또한 그렇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지만 결국 소중한 생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다. 사람마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으니 나를 부정적으로 이해하기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바라보는 노력도 나쁘지 않다.
여행길에 만나는 사람들은 어떤 것으로 분별하지 않아도 좋은 인연들이다. 앞에 가는 사람은 길잡이가 되어주니 좋고 옆에 가는 사람은 안부를 물어주니 좋고 뒤에 오는 사람은 뒤에서 지켜주니 좋은 것이다. 더러 걸림으로 남는 인연이 있다면 누구를 만나 대우를 받겠다는 마음으로 떠난 길은 아니기에 법당에서 삼배를 하면서 그 사람의 안녕을 빌어주는 것도 좋은 맺음이다.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기는 마음으로 장애를 장애로 보고 다름을 바로 인정하는 데서 모든 것을 시작한다면 스님의 “놓음 없이 놓고, 다 함이 없이 무엇이든 다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
부딪히고 살다보면 비우고 내려놓기 위해 애를 쓸 때가 많다. 그러나 애써 놓으려 하지 않아도 어느 암자 돌부처와 마주 앉아 쉬면 술렁이던 마음은 잦아지고, 돌탑 하나 쌓으면 다 내려놓아진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 자신이 스스로 만든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가 많다. 한 노보살이 불편한 몸으로 어딜 다니느냐고 야단치듯 말을 건낼 땐 “다닐만 합니다”라고 하면서 돌아서지만 기분이 유쾌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 노보살의 말이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긍정의 마음을 먼저 가졌다면 불쾌할 이유가 없는 것임에도 스스로 걸림을 만들곤 한다.
나 혼자 좋아서 떠나온 길. 그렇게 산사나 암자에 잠시 머문 시간동안 집착을 버릴 생각도 잊고 수행을 잘 해야 하겠다는 다짐조차 없다. 무심히 떠나왔다 돌아가는 회향일 뿐이다.
봄에 다친 상처가 지금까지 아픔으로 남아 있지 않듯, 지난 여름 더위 속에서 땀 흘리던 날을 지금 있는 일처럼 다 기억하지 못하듯. 그렇게 그렇게 잊고, 놓으면서 사는 삶이 곧 여행이고 수행인 것이다.
최명숙 보리수아래 대표 cmsook1009@naver.com
[1571호 / 2021년 1월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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