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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수행으로 무상·무아 통찰하다

  • 교계
  • 입력 2021.01.29 16:10
  • 호수 1572
  • 댓글 2

한국명상원 위빠사나 수행 현장 취재

괴로움, 빨리어 원뜻은 하찮고 실체 없는 것
알아차림으로 자유로운 해탈 얻는 힘 기른다

1월23일 서울 상좌불교 한국명상원에서 수행자들이 경행을 하고 있다.
1월23일 서울 상좌불교 한국명상원에서 수행자들이 경행을 하고 있다.

1월23일 오후 2시 30분 서울 강남에 위치한 상좌불교 한국명상원에 수행자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수행법회 시간은 3시지만 무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코로나19로 그동안 모일 수 없던 수행자들은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가 완화됨에 따라 마침내 한국명상원에 모여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아직 전면적인 대면모임을 가질 수 없어 소수만 모였지만 수행자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기쁜 표정이 가득했다.

오후 3시 법회는 귀경게와 삼귀의를 염송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 붓다사’로 시작하는 귀경게, ‘붓당 사라낭 가차미’ ‘담낭 사라낭 가차미’ ‘상강 사라낭 가차미’ 등의 삼귀의를 읽는 목소리가 잔잔하지만 힘 있게 명상원 내에 퍼졌다. 이어진 시간은 ‘안부묻기’였다. 선원장 묘원 법사는 수행자들의 면면을 알고 있었다. 약 30분간 이어진 법사와 수행자간 따뜻한 인사에서 수행을 염원한 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법문이 시작됐다. 이날의 주제는 ‘사성제 중 괴로움의 진리인 고성제’였다.

“괴로움은 빨리어로 둑카(dukkha)라고 한다. 이는 하찮은 것이라는 뜻의 두(du)와 비어 있다는 뜻의 카(kha)의 합성어다. 뜻으로 보면 하찮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것을 대단하게 키워서 큰 것으로 생각하고 고통을 겪는다. 괴로움을 고(苦)라고 하지만 정확한 뜻은 불만족이다. 괴로움이란 욕망과 어리석음과 유신견으로 인해 크게 생각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는 하찮은 것이다.”

1시간쯤 지나 법문이 끝나자 묘원 법사의 지도에 따라 수행자들은 경행에 들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념처를 잘 관찰해야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걸으며 집중해 보세요. 발을 들고자 하는 의지, 발의 움직임, 옮기고 내려놓겠다는 마음, 하나하나 집중하고 알아차리세요.”

수행자들의 속도는 제각각 달랐지만 모두 하나같이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긴 채 발을 떼었다 놓으며 걷기를 여러번 반복했다. 다리가 아플 법한데도 쉼 없이 경행을 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고요하며 평화로웠다.

처음 5분은 ‘왼발’ ‘오른발’ 하며 자신의 걸음걸이와 발의 무게를 알아차린다. 다리의 근육이 풀리면 걷는 속도를 낮춰 ‘듦’ ‘나아감’ ‘놓음’ 3단계로 동작을 나눠 매 순간 신수심법을 관하려 노력한다. 일정한 거리를 왕복해서 걷는 경행은 수행을 지탱할 수 있는 근력을 키우며 나태함에서 벗어나게 한다. 매 순간 알아차림을 놓치지 않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기본이다. 30분가량 진행된 경행이 끝나자 수행자들은 좌복에 앉았다.

“반가부좌 결가부좌 어느 쪽도 좋으나 허리는 반드시 곧게 펴세요. 호흡은 자연스럽게 하되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합니다.”

수행자들은 반가부좌 혹은 결가부좌를 틀고 두 손을 아랫배에 댄 채 두 눈을 감고 들숨과 날숨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오랫동안 고정된 자세로 앉아있으면 다리가 저리고 아프기 마련인데 그 느낌이 일어난 몸의 부위를 ‘피곤함’ ‘아픔’ ‘가려움’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만약 느낌이 강해져 수행에 방해가 될 정도가 되면 자세를 바꿔도 된다. 그러나 자세를 바꿀 때도 ‘자세를 바꾼다’고 알아차려야 한다.

마지막은 개인 면담시간이었다. 코로나19로 집에서 정진한 수행자들은 그동안 쌓아왔던 궁금함이 많았다. 좌선 시 알아차림에 집착해 숨이 잘 안 쉬어진다는 수행자, 망상이 끊이지 않는다는 수행자, 문득 수행하기가 싫어진다는 수행자 등 다양한 질문이 이어졌다.

김교수(청담, 65)수행자는 “수행하기 전에는 성격이 날카롭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며 “알아차림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관하고, 이를 통해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묘원 법사는 “위빠사나 수행은 없애려는 수행이 아닌 나타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알아차림’ 수행”이라며 “수행으로 마음과 육체의 현상을, 다음에는 의도와 조건을 알아차리게 되고 곧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게 된다”고 전했다.

윤태훈 기자 yth92@beopbo.com

[1572호 / 2021년 2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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