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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락중도의 문명사적 의미에 대하여

고행 접었을 때가 붓다 삶의 가장 위대한 순간

6년간 수행 통해 선정·고행의 극점 올랐고 깨달음 아님 알아채
선정·고행 모두 ‘끝까지’ ‘철저하게’ 밟았기에 미련 없이 돌아서
고락중도는 제3의 길 아니라 없던 길 만들어 낸 붓다의 새 여정

파키스탄 펀자브주(州) 라호르박물관의 석가모니 고행상.
파키스탄 펀자브주(州) 라호르박물관의 석가모니 고행상.

음력 12월8일은 성도재일이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루신 깨달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세상을 생각하면 성도재일은 부처님오신날 이상의 큰 행사로, 전 세계인이 함께 기념해야할 축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마도 3월경 연재에는 부처님 깨달음의 문명사적 의의에 대해서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오늘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에 이르시게 되는 수행의 과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고의 속박을 벗어나 완전한 해탈을 이루고자 결심하신 싯다르타는 출가하여 사문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당시 사문들의 수행법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선정 수행과 고행 수행이었습니다. 여러 기록으로 보아 당시 대다수 사문들은 선정보다는 고행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싯다르타는 처음 선정 수행을 닦습니다. 스승들이 제시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였고 스승들은 더 이상의 경지는 없다고 단언하였지만, 싯다르타는 그것으로는 완전한 해탈에 이르지 못하다는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선정에서의 경험이 일상으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련 없이 선정 수행을 그만둔 싯다르타는 고행 수행을 시작하였습니다. 고행은 주로 세 가지 방식이었습니다. 강압적인 마음제어, 호흡을 멈추는 지식(止息) 그리고 음식을 끊는 단식이었습니다.  철저한 고행과 초인적인 인내의 과정은 경전에 잘 나와 있고 후일 인도북부의 불교도들이 조성하였던 고행상은 당시 싯다르타의 모습을 마치 사진처럼 사실적인 조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가 이후 성도에 이르기까지 만 6년의 세월이 걸렸다는 것을 감안할 때, 싯다르타의 고행은 짧은 기간이 아니라 수년에 걸친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고행으로는 고를 끊고 해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을 때 싯다르타는 주저 없이 고행을 그만둡니다.

인간붓다가 걸었던 삶의 여정을 생각할 때 저는 그분이 고행을 그만두었을 때가 가장 위대한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왕자의 길을 버리고 선택한 사문의 길은 기왕에 있던 길이었습니다. 이미 있던 길을 따라 선정을 닦았지만 그 길이 찾던 길이 아님을 알고 고행의 길을 갔습니다. 이 고행의 길 또한 기왕에 나 있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행의 길마저 버렸을 때 싯다르타 앞에 길은 없었습니다. 왕자에게 주어진 크샤트리야의 길 그리고 사문으로서 선정과 고행의 길마저 다 버린 싯다르타 앞에 길은 없었습니다. 다음 호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당시 인도의 종교문화에서 진리를 향한 구도의 길에는 ‘카스트의 직분에 충실하게 사는 길’ ‘사문으로서 선정을 닦거나 고행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고행을 그만둔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졌던 최후의, 마지막 길마저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진리에 대한 엄정함과 철저한 구도심이 없다면 감히 내리지 못했을 위대한 결단이었습니다.

이 결단이 위대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기왕의 길을 끝까지, 철저히 밟아본 자만이 그 길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행의 극점에서만이 그것이 진리의 길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당신께서 고행을 그만두었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하셨습니다.

“어떤 사문들이나 바라문들이 고행에 매진하였어도 그들 가운데 어떤 이도 내가 닦는 고행 이상을 넘지 못했다. 나는 생각했다. 이 고행으로는 도를 이룰 수 없고 최상의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 

고행의 극점에 까지 가 보았기 때문에 미련 없이 그 길을 버리고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다섯 비구가 몰랐던 것은 바로 이 점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결단이 제3의 길을 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3의 길이란 ‘세 번째의 길’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길’ ‘새로운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도 후 돌아보면 그 길이 중도요 진리에 이르는 길이었다고 하겠지만, 기왕의 모든 길을 다 버리고 고행의 길마저 버린 그 순간, 그 앞에 한 뼘의 길도 보이지 않았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인미답의 의미는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싯다르타가 고행의 길을 버렸을 때 그의 앞에 놓여있던 것은 ‘전인미답’ —-누구도 가 본적이 없는, 길인지 아닌지 조차도 확신할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행을 그만 둔 순간을 싯다르타의 위대한 결단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공자도 위대한 분이지만, 그의 앞에는 주공(周公)의 길이 있었습니다. 예수도 위대한 분이지만, 그의 앞에는 야훼의 길이 있었습니다. 역사상 성인이 많았지만, 부처님처럼 기왕의 길을 버리고 제삼의, 없던 길을 간 성인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싯다르타의 수행과정을 언급하고 있는 경전 내용을 잘 살펴보면 선정 수행과 고행 둘 다 성도에 이르지 못하는 시행착오의 길이지만 그 각각에 대한 부처님의 평가는 다소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선정 수행의 경우 부처님께서 성도 하신 직후 두 스승을 교화하기 위해 찾았다는 사실 그리고 두 스승에게 배웠던 선정의 경지를 불교 선정의 무색정(無色定)에 배대하고 있다는 점(물론 그것들이 같다는 것은 확인 할 수 없습니다)으로 보아 그들의 선정을 ‘불충분’ 혹은 ‘불완전’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예 ‘틀린 수행법’으로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고행에 대해서는 경전의 곳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아예 그릇된 수행법으로 평가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고행을 그만 두었을 때 싯다르타는 ‘끝까지 해보았는데 안 되더라’ 정도의 경험적 확신이 아니라, 그것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는 분명한 철학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자이나교를 비롯하여 대다수의 사문들은 “해탈에 이르는 길에 행복은 장애물이며, 고통은 해탈의 필수적 조건”이라는 일종의 시대적 믿음이 있었습니다. 녹야원에서 부처님이 오시는 것을 본 다섯 비구가 “저기 타락한 사문이 온다”고 하였던 것도 그러한 시대정신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6년간의 치열한 수행의 과정에서 그 믿음이 근거 없는 것이며 오히려 해탈의 길을 장애하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고락중도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나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연재에서 이어 가겠습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572호 / 2021년 2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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