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만암 스님의 선견지명

기자명 이병두

1월27일 전남 장성 백양사에서는 ‘만암당 종헌 대종사 제64주기 추모다례재’를 봉행하였다.

스님은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뒤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예속하려 시도할 때에 만해·한영 스님 등과 함께 임제종을 설립하여 맞섰다. 1916년 백양사 주지가 된 뒤에는 극락전 한 채만 남아 있을 정도로 쇠락했던 도량을 일으켜 대찰의 면모를 살려냈으며, 여러 학교(광성의숙‧심상학교와 불교전수학교‧정광중고등학교)를 세워 출가수행자뿐 아니라 지역 주민을 위한 교육에 앞장섰다. 또한 불교가 수행과 전법의 역할에 충실하려면 교단이 재정자립을 이룩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금호고속관광의 전신인 전남여객 등 여러 기업체를 설립·운영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조계종단이 재정 자립 문제를 고민하며 사업을 시작하기 100여년 전의 일이다.

스님이 적멸에 든 지 60년이 훌쩍 넘어선 지금, 스님을 재조명해야 할 필요는 앞에서 이야기한 몇 가지 사안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선견지명 때문이다. 스님은 일제강점기의 임제종 설립 운동부터 시작해 해방 뒤에도 “비구수행자 중심의 교단을 확립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정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면서도 1947년 백양사에 고불총림을 결성할 때 총림 규약에 비구와 취처승의 역할을 나누어 정해, 다수를 차지하던 취처승들을 강제로 쫓아내지 않는 점진적 정화 방법을 택하여 물리적·법적 충돌을 막았다. 스님이 세운 이 원칙에 따라 백양사에서는 1970년대 초까지도 호법중(취처승)과 전법중(비구승)이 같은 공간에서 예불을 드렸다고 한다.

이처럼 스님은 “현실을 직시하면서 종단이 자주적으로 정화를 펼쳐나가야 한다”는 원칙을 무엇보다 중시여겼다. 1952년 열린 전국 승려대표자대회와 고승회의에서도 “모든 사찰은 비구가 맡는다. 다만 현재 주지를 맡고 있는 교화승은 포교·종무·사업체 운영의 기득권을 인정하되 더 이상 상좌를 두지 않는 것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은 당시 가족을 부양하는 취처승이 승가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을 고려한 것이다. 무엇보다 승가 분열을 경계한 것으로 “외부 힘에 기대지 않고 화합 승가 원칙에 따라 불교계 스스로 정화를 해야 한다”는 깊은 고민에서 나온 원칙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길이었다.

그때 스님의 제안대로 했다면, 큰 충돌 없이 취처승이 감소해 수십 년 안에 자연스럽게 비구 종단으로 우뚝 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루 빨리 비구 종단을 세워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세우며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혀 있던 이들에 밀려 스님의 이 제안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폭력을 동원한 충돌과 법적 소송을 통한 갈등 해결’의 잘못된 풍토가 사라지기는커녕 관습이 되어 막대한 삼보정재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불교의 이미지를 실추시켜 불교 인구의 감소를 가져오는 등 상처가 너무 컸다.

스님은 1954년 한암 중원 스님의 뒤를 이어 조계종 종정이 되어 종헌종법 제정을 주도하면서 한국불교 중흥의 원력을 세웠지만, 폭력배를 동원하여 취처승 측 사찰을 강제 접수하는 등의 비불교적인 현실에 실망하여 종정에서 물러나 백양사에서 수행과 후학 지도에만 매진하다 입적하였다.

‘1대 9’로 취처승에 비하여 비구승이 수적으로 열세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서둘러 비구 종단을 세워야 한다는 정화 추진자들의 심정은 이해될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로 인해 폭력이 난무하는 사찰 차지하기 싸움이나 걸핏하면 고소와 고발, 민사소송으로 이어지는 불교계 전반의 비불교적인 행태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많은 이들이 “그때 만암 스님의 제안대로 했어야 한다”는 말을 하면서도 이름을 드러내 공론화하기는 주저한다. 그러나 이제 슬프고 아픈 정화 과정을 거쳐 탄생한 조계종단에서 만암종헌 스님을 재조명하여, 과거사의 잘못과 실패를 성찰하고 미래의 교훈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573호 / 2021년 2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