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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며시 미소 짓고 눈물이 핑 도는 ‘고마리 시’

  • 불서
  • 입력 2021.02.06 13:48
  • 호수 1573
  • 댓글 0

‘터널을 지나며’ / 홍사성 / 책만드는집

‘터널을 지나며’

‘당신 사랑을 독차지해서 좋아요/ 당뇨로 한쪽 발목 자르도록 혼자 밥 먹게 한 게 미안해 일찍 들어갔더니 날마다 식단 바꿔가며 정찬 차려내더란다/ 다 먹지도 못할 걸 왜 억지 고생이야/ 안쓰러운 마음에 핀잔 줘도 호박꽃처럼 웃기만 하더니 함박눈 쏟아지던 어느 날 그 웃음 남겨놓고 눈 감더란다/ 내자도 떠날 걸 알고 있었던 말이지/ 그런 것 같아 매일 이별 밥상을 차렸던 게 아닌가 싶어 그러니까 몇 달간은 늘 마지막 밥상을 받은 셈이지/ 혹시 화장실 가서 몰래 웃는 거 아녀/ 누가 위로랍시고 객쩍은 농담 꺼냈지만, 사내들은 술청 밖으로 고개 돌리고 술잔만 들었다 놨다 하다 일어섰다’(‘마지막 정찬’ 전문)

시는 속독을 허락하지 않는다. 시를 읽는 행위는 잠시 멈춰서는 일이다. 손쉽게 보고 읽을거리가 넘쳐나지만 시가 주는 통찰과 여운은 다른 언어로는 대체 불가하다. 

2007년 늦깎이로 문단에 등단한 홍사성 시인의 세 번째 시집 ‘터널을 지나며’는 시의 매력이 진드근히 묻어난다. 고즈넉함과 예스러움, 애틋하고 아련함, 슬며시 미소 짓게도 하고 눈물이 핑 돌게도 한다. 자꾸만 곱씹다보면 책장 넘기는 손길은 저절로 더뎌진다.

평생 희로애락을 함께 했던 아내를 떠나보내는 애절함을 표현한 ‘마지막 정찬’과 아내 잃은 동창이 한밤중에 전화해 비애감을 털어놓는 ‘울컥’, 단풍이 짙게 든 설악산의 ‘환장할 경치’를 보여주려고 병든 아내를 휠체어에 태워 기를 쓰고 비선대까지 올라온 부부 얘기인 ‘설악산 풍경’은 숙연하고 먹먹케 한다.

‘언제부턴가 자동차가 이상하다/ 벨트를 교환하면 오일이 새고/ 시동을 걸 때마다 엔진이 켁켁댄다/ 가끔씩 타이어도 펑크다/ 정비사 말로는/ 연식이 오래되면 다 그렇단다/ 폐차할 때는 아니니 고쳐가며 타란다’(‘고물자동차’ 전문)

시인의 오래된 자동차 얘기일 수 있다. 허나 연식 오래된 자동차에서 나이 들어 여기저기 아파오는 자신의 몸뚱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세상 만물이 생로병사 성주괴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치를 아프게 일깨워준다. 십몇 년을 같이 지내던 텔레비전을 명퇴시키는 ‘안녕, 텔레비전’, 등심을 구워 먹다가 궁금해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한 등심의 사전적 설명을 읽고 나서는 ‘저 빨간 석쇠 위에 내 등심을 올려놓으면 어떨까/ 요설을 늘어놓던 혓바닥이 굳었다’는 ‘유구무언’도 예사로 보아 넘기기 어렵다.

그의 시는 장미와 백합의 화려함이 아닐지라도 볼수록 소소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시인이 서시에서 밝히듯 ‘봄이며 여름이며 그 향기롭던 시절 다 보내고/…바람 불고 서리 내려 산도 들도 수긋수긋할 무렵/ 부끄럽게 얼굴 내민 겨우 핀’ 분홍 고마리를 쏙 빼닮았다. 1만원.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573호 / 2021년 2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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