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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 ② (1) 삼국통일 과정과 역사적 의의 - 중

“통일전쟁은 고구려와 수·당 각축” 주장은 신라 자주적 노력 간과

유교이념 채용정책으로 불교적 신성 매달린 정치적 혼란 극복
삼국통일 전쟁에서 백제와 신라는 조연 불과하다는 시각 존재
당 항의에도 김춘추에 태종과 같은 묘호, 통일주체로서의 자긍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제9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진덕여왕 2년(648)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에서 나당동맹협정이 체결된 것은 삼국통일전쟁의 출발점이 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사실은 신라인들에게 크게 각인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신라말기 최치원이 찬술한 ‘성주사낭혜화상비명’에서 구체적으로 특필하였던 내용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김춘추의 대당외교에서 간과할 수 없는 점은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동맹협정의 체결을 전후하여 다양한 문화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이다. 김춘추는 당에 도착하자, 먼저 국학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에 참관하기를 요청하여 당 태종의 허락을 받았고, 군사협정을 체결한 뒤에는 중국의 장복(章服)제도를 따를 것을 요청하여 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선물 받았다. 그리고 18세 미만의 셋째 아들 문왕을 데리고 가서 숙위(宿衛)로 남겨 놓도록 하였다. 그는 신라 국왕과 동급인 특진(特進,문산관정2품), 아들은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직사관종3품)을 제수 받고, 성대한 송별 잔치 등 파격적인 후대를 받고 귀국하였다. 김춘추는 귀국한 다음해 중국의 의관(衣冠)제도 채용, 아홀(牙笏) 착용, 새해의 하정례(賀正禮) 시행, 중국의 연호 사용 등 문화개혁을 추진하였다. 또한 집사부와 이방부 등의 중앙행정관부를 설치하고, 유교정치이념을 채용하는 등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김춘추의 이러한 일련의 문화적・정치적 개혁은 친당정책의 일환으로서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앞서 선덕여왕대(632〜647) 국왕이 정치적 권력을 상실하고 불교의 종교적 신성에만 매달림으로 말미암아 야기되었던 정치적 혼란을 극복하여 왕권의 안정을 추구하는 정치개혁으로서의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3국 가운데 문화면에서 가장 후진국이었고, 정치면에서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외교면에서 김춘추에 의한 친당정책의 성공과 함께 과감한 문화・정치개혁을 통해 왕권강화와 국력결집에 성공할 수 있었고, 그 위에 김유신 같은 뛰어난 군사지휘관의 능력이 보태졌기 때문이었다. 외형상으로는 군사력에 의한 백제・고구려의 멸망으로 실현되었지만, 결코 군사력만으로는 통일의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한편 김춘추의 대당외교활동에서 특기할 사건은 진덕여왕 4년(650) 자신의 큰 아들 법민(뒷날의 문무왕)을 당에 보내어 당 고종에게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바치고, 처음으로 당의 연호 영휘(永徽)를 사용한 것이었다. 진덕여왕의 이름으로 지어진 태평송의 내용이 당 황제를 찬양하는 것이었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굴욕적인 사대외교로 비판받을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법민은 당 고종의 호감을 사서 종3품의 태부경(太府卿)으로 임명되는 우대를 받았는데, 그보다 더욱 중요한 성과는 신라가 3국 사이의 외교경쟁에서 확실한 승리를 거둔 사실이었다. 당시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항쟁과정에서 당의 협력과 지원을 받기 위해 각각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법민이 다른 2국 사신의 주장을 일축하고, 당 고종의 지지를 이끌어낸 것이었다.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에 의하면, 의자왕 11년(651) 당 고종이 백제 사신에게 준 새서(璽書에서 다음의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전략) 지난 해(650) 고구려・신라 등의 사신이 아울러 입조하였을 때, 나(당고종)는 그들에게 원수(怨讐)를 풀고 다시 화목을 도타이할 것을 명하였다. 신라의 사신 김법민이 아뢰기를, ‘고구려와 백제가 순치(脣齒)와 같이 서로 의지하여 마침내 무기를 들고 번갈아 침략하여 오니, 대성(大城)과 중진(重鎭)이 모두 백제에게 병합된 바가 되어 강토는 날로 줄어들고 위력도 쇠하였다. 바라건대 백제에 조서를 내려 침략한 성을 돌려주게 하고, 만일 조명을 받들지 않거든 곧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 공취할 것이다. 그러나 옛 땅을 얻으면 곧 화호(和好)를 청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말이 타당하므로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백제)왕이 겸병한 신라의 성을 모두 그 본국에 돌려줄 것이며, 신라도 또한 잡아간 백제의 포로를 왕에게 돌려보낼 것이다. (중략) 왕이 만일 나의 처사에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법민의 요청하는 바에 의하여 왕과 결전할 것을 맡길 것이요, 또 고구려와 약속하여 멀리서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일 명령을 받들지 아니하면 곧 거란과 여러 종족(藩)으로 하여금 요하를 건너 깊이 쳐들어가 침략케 할 것이다. 왕은 깊이 나의 말을 생각하고 스스로 다복하기를 구하고, 양책을 도모하여 후회를 끼치지 말지어다.”

진덕여왕 4년(650) 당 고종이 신라의 지지를 선언한 이후 삼국통일전쟁은 당 고종이 선언한 대로 진행되어 고구려와 백제는 연합하여 신라를 공략하였고, 당은 신라를 지원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려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정세를 개관하면,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27대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세우면서 전제적인 정치권력을 구축하고 당에 대한 강경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642), 백제에서는 한 해 앞서 국가 부흥을 위해서 노력하던 30대 무왕이 죽고, 의자왕이 즉위하여 왕권을 강화하면서 신라에 대한 침공을 서둘고 있었다(641). 반면 신라에서는 28대 진덕여왕이 즉위하면서 김춘추가 실권을 장악하고(647), 국내의 정치・문화 개혁을 추진하면서 당에 대한 친선정책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후 삼국통일전쟁은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백제의 의자왕, 그리고 신라의 김춘추 3인의 주도권 경쟁으로 전개되었다. 3인 사이의 경쟁은 당을 상대로 한 외교전으로 전개되었는데, 3국 사이의 세력균형에 가장 큰 변수가 당의 향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648년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에 체결된 나당협정, 그리고 650년 3국의 사신에 대한 당 고종의 신라 지지선언으로 3국 사이의 외교전은 김춘추-법민 부자의 일방적 승리로 결판나게 되었다. 그리고 뒤이어 나당협정에 의해 먼저 약소한 백제의 사비가 함락되었으며(의자왕 20년, 660), 다음에 고구려의 연개소문의 죽음과 아들 사이의 내분으로 평양이 함락되고 말았다(보장왕 27년, 668). 역사적으로 삼국통일에 대한 이해와 평가는 두 가지 시점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삼국통일을 고구려・백제・신라 3국 사이의 항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여 얻은 결과물로 이해하는 시점이고, 둘째는 동북아시아의 세력들을 대표하는 고구려와 중국의 통일세력인 수・당 사이의 각축전에서 고구려가 패망함으로써 수・당 편에서 섰던 신라가 얻게 된 부산물이 삼국통일이라고 이해하는 시점이다. 

두 시점 가운데 첫째는 삼국통일전쟁과정에서 신라의 역할이 강조되며, 나아가 신라가 통일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원인을 밝히려는 노력으로 연구가 집중되었다. 그리고 신라의 지배세력을 대표하여 대당외교를 성공적으로 추진하여 당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낸 김춘추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아울러 김춘추의 활동을 군사적으로 뒷받침한 김유신의 역할도 강조됨으로써 삼국통일의 두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김춘추가 죽은 뒤에 ‘무열왕(武烈王)’이라는 시호와 함께 ‘태종(太宗)’이라는 묘호를 올린 것에 대하여 신문왕 12년(692) 당 중종이 사신을 보내어 “당의 태종과 같은 묘호를 쓰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며 고칠 것을 요구하여 온 일이 있었는데, 신라는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덕이 있었고,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으니, 그 공적을 이룩한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여 끝내 관철하였다. 두 사람의 업적에 대한 평가와 일통삼한(一統三韓)을 달성한 주체로서의 긍지는 고려시대 이후까지 계승되고 있으며, 특히 유교사관에 의해 강조되어 왔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김춘추의 친당외교 업적과 김유신의 군사 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대서특필하였다. ‘신라본기’에서는 김춘추와 그 아들들과 함께 김유신 형제의 활약상이 자세하게 기록되었고, ‘열전’에서는 전체 10권 가운데 김유신 1인에게 3권을 배당할 정도로 중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삼국사기’에서 김춘추와 경쟁자 관계였던 연개소문과 의자왕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가혹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반역’편에 수록하면서, “연개소문은 역시 재사(才士)였으나, 곧은 도(道)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포(殘暴)를 마음대로 하여 대역에 이르렀다”고 혹평하였다. 그리고 의자왕에 대해서는 ‘백제본기’에서 “어버이 섬기기를 효도로써 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의 일컬음이 있었다”고 인물을 평가하면서도 실제 행적에 대한 기록에서는 성충과 의직 같은 충신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한 무절제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었다.

둘째 삼국통일전쟁을 동북아시아 세력들의 대표주자인 고구려와 중국의 통일세력인 수・당의 각축전으로 이해하는 시각은 역사 무대를 한반도 지역으로 제한하는 첫 번째 이해에 비하여 동북아시아 전역으로 시야를 크게 넓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삼국통일전쟁은 동북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종족이 참여한 국제전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우선 6세기말경 중국 대륙에서 오랜 동안 분열을 계속해 오던 남북조를 수가 통일하는데 성공하고, 오래지 않아 당으로 이어지면서 대외적인 팽창을 모색하고 있었으며, 북방의 초원지대에서는 돌궐의 신흥세력이 일어나 수・당을 위협하는 형세가 되었다. 그러나 7세기 중반 당에 의해 돌궐이 격퇴당하면서 그와 연결하여 당에 대항하던 고구려가 북방의 대표주자로 나서 당과 각축하게 되었다. 그런데 고구려와 수・당의 양대 세력의 각축전에는 북방의 돌궐 외에도 거란과 말갈,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 바다 건너 왜 등이 참여하여 국제전의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마침내 고구려가 멸망되면서 당과 동맹국인 신라가 백제 지역을 영유하게 된 것이 신라의 삼국통일로 나타난 것으로 본다. 

결국 고구려와 당이 삼국통일전쟁의 주역이고, 백제와 신라는 조연에 지나지 않았으며, 특히 신라에 의한 백제 지역의 영유는 부산물의 수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통일전쟁에서 최대 업적의 자리는 김춘추의 친당외교 대신 연개소문의 자주적인 강경투쟁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각은 역사의 무대를 한반도 지역으로 제한하는 좁은 시야를 동북아시아로 크게 넓혔다는 의의를 갖지만,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7~8년의 장기간 치열한 전쟁을 통해 당의 세력을 축출함으로서 민족의 생활권을 확보한 신라의 자주적인 노력은 간과되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573호 / 2021년 2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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