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깊고 넓은 통찰 가운데 하나는 식과 명색의 관계다. 우리는 인식한 것에 이름을 붙이고, 이름이 있어야 그것을 제대로 인식한다. 책상이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면 우리에게 책상은 어떻게 보일까? 책에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면 책을 책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고대 유물을 발굴하는 이들은 늘상 이 문제에 부딪친다. 오래 된 지층에서 캐내 살살 먼지를 털어낸 이 물건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이 뼛조각은 어떤 동물의 일부였을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식과 명색이 단절된 유물은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상상력이 버무려져 물건의 용도가 결정되고, 새로운 발견에 의해 뒤집히기도 한다. 깃털로 뒤덮인 낯선 공룡 상상도를 보라. 신라금관의 용도가 머리에 쓰는 것이라는 학설이 뒤집히고 시신의 얼굴에 씌우는 장송의례용품이었으리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 과정을 보라.
이 책은 1985년 멸망한 세계를 4022년의 후손 하워드 카슨이 발굴한다는 설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풍경이 그들에게는 낯설고 신비롭다. 하워드 카슨이 집중적으로 발굴하는 곳은 고속도로변의 모텔이다. 그는 이곳이 “고대 무덤”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발굴한 물건을 모두 그 설정에 끼워넣는다.
카슨과 동료들이 신비롭게 들여다보는 모든 물건들은 우리에게는 익숙한 것이다. 그들은 서랍장 위에 놓인 TV를 보고 “대제단”이라고 단정한다. 방의 모든 것은 대제단을 향해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해골이 놓여있는 “예식 플랫폼”은 정면에 있다. 우리는 그것이 침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술병은 다양한 “제기”들로, 스탠드조명은 “와트 신상”으로 여겨진다. 얼음을 담는 그릇에는 커다랗게 “ICE”라고 쓰여있는데, 이것을 “Internal Component Enclosure(내부장기 보호구역)”으로 해석한 그들은 죽은 사람의 장기를 넣어두는 이집트의 카노푸스 단지가 진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내실”이라 부르는 화장실 발굴은 점입가경이다. 욕조는 “아티카식 석관”으로, 양변기는 “성스러운 항아리”로, 그 위의 물탱크는 “뮤직박스”로, 두루마리 휴지는 “성스러운 양피지”로 기록한다. 양변기 시트는 “성스러운 고리”라 예식 때 목에 걸고, 칫솔은 “플라스티쿠스 귀 장식품”, 그리고 욕조마개는 “정교한 은사슬과 팬던트”라며 치렁치렁 늘어뜨린 모습을 상상한다. 그들이 그 물건들을 착용한 모습은 진지하지만 우스꽝스럽다. 기념품도 만드는데, 양변기로 만든 커피잔 세트에 이르러서는 실소가 터진다. 알면 쓸 수 없는 제품이지만 미래의 후손들은 경건하게 차려놓고 평화로운 티타임을 즐기겠지.
저자는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가 발굴한 이집트의 투탕카멘 무덤을 풍자하고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이 발굴한 모텔 이름도 “투탠커몬”이다. 당시 무덤 안에서 발견된 화려하고 진귀한 보물은 일일이 이름과 용도가 붙어 전시되었다. 그러나 학자들의 해석이 정확했는지 검증해줄 사람은 아무도 살아있지 않다. 새로운 식은 새로운 명색을 만든다. 하워드 카터 이후의 사람들은 이집트 유물을 고고학자들이 해석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납득할 수밖에 없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편리하지만 한번 이름 붙은 물건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어려워진다. 양변기가 모델인 것을 알고 나면 똑같이 재현한 커피잔 세트를 사용하기 힘든 것처럼. 그렇게 세계는 고정되고 좁아진다. 핀셋으로 집어서 압정으로 꽂아놓은 듯한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이 두 세계 사이의 덜그럭거림이 고통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여실지견을 그토록 힘주어 말씀하셨으리라. 식과 명색 너머의 세계, 식과 명색에 가려진 세계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침대에서 자고, TV를 보며, 양변기에서 볼일을 보고 물탱크의 밸브를 눌러 시원하게 내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박사 북칼럼니스트 catwings@gmail.com
[1573호 / 2021년 2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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