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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연기와 공은 동일할까

“공한 모든 것이 반드시 연기하는 것은 아냐”

‘연기와 공이 동일하다’는 주장 성립하려면 그 외연 일치해야
자성 결여한 공으로부터 만물이 생멸하는 연기는 나오지 않아
그러나 우연히도 우리는 ‘연기=공’이 참인 세계에서 살고 있어

그림=허재경

연기(緣起)가 공(空)이라는 주장은 대승의 상식이다.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성·지속·소멸한다면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면 스스로를 스스로이게끔 하는 어떤 본성, 즉 자성(自性)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만물은 자성을 결여한다는 의미에서 공하다. 만물이 연기하기에 공하고, 따라서 연기하는 것이 공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연기가 공’이라는 주장은 옳다. 그런데 연기와 공이 동일하다고, 즉 ‘연기=공’이라고까지 볼 수 있을까?

먼저 “연기와 공은 동일하다”는 명제를 분석해 보자.

1. “연기=공”은 ‘연기’와 ‘공’ 두 개념이 적용되는 대상의 집합, 즉 외연(外延)이 일치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물은 모두 연기하여 모두 공하다. 그러면 ‘연기=공’이라는 주장은 두 개념이 각각 모든 만물을 포괄하여 외연이 같다는 참된 동일성 주장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주장이 반드시, 필연적으로,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일까?

2. ‘연기=공’이라는 주장이 연기의 가르침과 공의 가르침이 동일하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주장이 옳지 않다는 점을 쉽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철학에서 ‘동일하다’는 것은 수적(數的)으로 하나이고 질적(質的)으로 같다는 뜻이다. 수적으로 하나라면 질적으로도 다를 수 없기에 이 기준은 결국 ‘수적으로 하나’라는 말이 된다. 철학은 “어떤 대상 a와 대상 b가 동일하다”는 명제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정의한다: ‘a이면 반드시 b이고 (a necessitates b), b이면 반드시 a이다.’ ‘반드시’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전에 연재한 ‘가능세계’에서의 논의를 빌자면, ‘모든 가능세계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래서 (a=b)는 ‘어떤 가능한 상황에서도 a와 b가 분리되어 둘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반드시’라는 점을 잠시 제쳐두고 위의 문장을 명제함수를 이용해 표현하자면 ‘(a→b) & (b→a)’이다. 이것은 (a↔b) 또는 (a≡b)이 된다. 만약 “a”와 “b”가 개념을 지칭한다면, (a↔b) 또는 (a≡b)는 a가 적용되는 대상의 외연(집합)과 b가 적용되는 대상의 외연이 일치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위의 1번 해석처럼 ‘연기=공’을 ‘연기하는 모든 것은 공한 모든 것과 각각 그 외연이 일치한다’고 이해한다면, 우리 세계에서 ‘연기=공’이라는 주장은 참이다. 그런데 a와 b가 동일성의 기준을 충족하려면 a와 b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이유를 살펴보겠다.

전지전능하다는 신이 존재하여 그가 어떤 세계를 만물이 자성을 결여하는 방식으로 창조하고 그냥 내버려 둔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만물은 서로를 조건으로 삼아 생성·지속·소멸하는 연기의 과정을 거칠까? 그럴 수 없다. 자성 없이 창조된 만물에 신이 어떤 일도 더 하지 않는다면 만물은 변화 없이 그냥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세계를 상상하기 어렵다면, 만물이 이미 공한 우리 세계에서 신이 어느 순간 모이고 흩어지는 모든 조건을 멈추어버렸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상황에서 조건들이 다시금 스스로 움직일까? 그럴 수 없다. 모든 운동과 변화가 멈춘다. 연기가 일어나지 않는다.

신이 손가락을 튕기거나 해서 어느 것에라도 첫 움직임을 시작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만물이 공하더라도 아무 것도 연기하지 않는 가능세계가 존재한다. 그래서 만물이 연기하면 반드시 공하지만, 공하여도 반드시 연기하지는 않기 때문에, 연기와 공이 반드시, 필연적으로, 모든 가능세계에서 동일하지 않다.

신이 어떤 세계를 만물이 연기하는 방식으로 창조했다면 그가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그곳의 만물은 저절로 공하다. 그러나 그가 다른 세계에서는 만물을 공하게만 창조하고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만물은 생멸할 어떤 조건도 없어서 연기하지 않을 것이다. 연기하는 모든 것은 반드시 공하지만, 공한 모든 것이 반드시 연기하지는 않는다.

이제, 위의 2번째 해석에 따라, ‘연기=공’이라는 주장이 연기의 가르침과 공의 가르침이 같은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보자. 이 해석에 있어서도 ‘연기=공’이라는 동일성 주장이 ‘연기법은 반드시 공의 가르침으로 귀결하고, 공의 가르침은 반드시 연기법으로 귀결한다’라는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연기의 가르침은 분명 공의 가르침이다, 즉 (a→b)는 반드시 참이다. 그런데 만물이 자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공의 통찰로부터 만물이 조건에 의해 생멸한다는 연기법이 나오지 않는다. 즉 (b→a)는 반드시 참이 아니다.

나는 대승전통의 일부 학자들이 사물이 ‘공하기 때문에 (연기하고) 변화한다’고 가르쳐 왔다는 점을 알고 있는데, 이는 위에서 내가 편 반대논증의 이유 말고도 논리학의 기본법칙을 오해한 실수다. 연기하면 공하다는 주장은 참이다. 한편 수학과 논리학은 어떤 명제의 대우(對偶)가 참이라고 가르치는데, “연기하면 공하다”의 대우는 “공하지 않으면 연기하지(변하지) 않는다”이다. 이 명제는 진리다. 공하지 않아서 고정불변의 자성을 지닌 사물은 연기하지도 변할 수도 없다. 불변의 자성이 그 사물에 고정되어 떨어지지 않는데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공하기 때문에 연기하고 변한다’는 주장은 논리학에서 말하는 후건긍정의 오류에 해당된다. 예를 들어 ‘성냥을 그으면 불이 붙는다’가 참이라고 해도, 이 문장의 뒷부분(후건)을 긍정하여 가설로 만들어 ‘불이 붙으면 성냥을 긋는다’고 결론지으면 이는 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연기하기 때문에 공하다’로부터 ‘공하기 때문에 연기하고 변한다’는 도출되지 않는다.

‘연기가 공’이라는 대승의 주장이 동일성 명제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은 반드시 참은 아니다. 그러나 우연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만물이 연기하여 만물이 공한 세계이다. ‘연기=공’이라는 동일성 주장이 반드시 참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는 모든 것이 연기하고 모든 것이 공한 세계에 살고 있다. ‘연기=공’은 우연하게 참이다.

홍창성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철학과 교수 cshongmnstate@hotmail.com

 

[1573호 / 2021년 2월1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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