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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이만익의 월인천강 : 디지털화된 불화의 프로토타입

기자명 주수완

덜어내고 덜어낸 불상…현대적 관음보살로 재탄생

아픈 도시풍광 가운데 섬광 감돌게 한 ‘청계천’으로 국전 입선
수상 위한 활동에 환멸 느끼고 오른 유학길서 ‘한국의 미’ 찾아 
한국 불상을 단순화시켜 캐릭터화 된 현대적인 개념으로 표현 

이만익, ‘월인천강’, 캔버스에 유채, 117×80㎝, 2002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삼화령 미륵삼존의 우협시보살상’(좌)과 이만익, ‘아기부처’, 20×16㎝, 부산시립미술관(우).

서양화가 이만익(李滿益, 1938~2012)을 잘 모르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뮤지컬 ‘명성황후’ 포스터는 많이 보셨으리라 생각된다. 그 작품이 바로 이만익의 작품이다. 

그는 황해도에서 태어났으나 1946년 가족들이 모두 월남하면서 초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이때부터 미술반에 들어가 그림을 공부했으며, 중학생이던 1953년에는 국전에 ‘정동의 가을’과 ‘골목’을 출품하여 입선할 정도였다. 입선시켜놓고 보니 고작 중학생인 것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로 인해 국전 출품자의 나이 제한 조항이 신설되었다고 하니 그의 실력이 얼마나 출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학교에서 그를 가르친 사람은 서양화가 박상옥(朴商玉, 1915~1968)이었는데, 그는 사실적 화풍을 위주로 하는 한국 아카데미즘 화가 그룹인 목우회(木會友)의 중심 인물이기도 했다. 이만익은 그런 박상옥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오랜 기간 서울 풍경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그림들을 주로 그렸던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성황후’ 포스터 속의 그림과는 사뭇 다른 화풍의 그림들이었던 것이다. 

1957년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그는 장발·장욱진·권옥연·문학진·김종영 같은 대가들로부터 배웠으며, 박서보·김창열·김서봉·윤명로·김봉태·최관도 등과는 화실에서 교류하며 함께 그림을 그리던 사이였다. 그의 재능과 성실성에 더하여 이러한 스승과 동료 화가들과의 교류는 그를 한층 깊이있는 화가로 만드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졸업한 후 1962년에는 화가 이봉상(李鳳商, 1916~1970)이 안국동에 개설한 미술연구소에 왕래하며 그림을 그렸는데, 이곳 역시 많은 출중한 화가들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만익은 특히 이곳에서 누드 그리는 법을 본격적으로 배웠다고 한다. 이 시기 그의 작품은 상당히 다양한 양상을 보여서 후기인상파나 표현주의, 야수파를 넘나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군복무를 마치고 1964년부터 다시 붓을 잡아 국전에 출품한 ‘청계천’은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비록 다양한 화풍을 시도하는 중에도 그의 인물화는 밝음 가운데 극적인 어둠이 깃들어 있거나, 어둠 가운데 섬광 같은 빛이 감도는 그 만의 특징이 반영돼 있었다. ‘청계천’과 같은 도시풍광에서 가난과 오염된 청계천이라는 아픈 풍경을 그렸음에도 화면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있다. 그러나 그 가난과 아픔을 외면하고 단순히 미적 요소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마치 어둠 가운데 그 안에도 소중한 생명과 삶이 깃들어 있다는 그 자체, 그리고 그 안에 꿈틀거리는 것 같은 희망까지 담아낸 듯한 정경은 이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이 작품이 국선에서 입상을 받은 것을 필두로 1968년까지 연거푸 국전에서 특선을 받으며 그는 주목받는 성공한 화가로서 입지를 다진 듯 했다. 그의 그림도 ‘청계천’과 같은 극적인 그림 외에 사실적이고 차분한 인물화풍도 보이는 등 보다 안정적으로 변화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왠일인지 그 이후부터는 국전에서 계속해서 낙선하는 고배를 마시게 된다. 왜 그가 갑자기 국전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여하간 이로 인해 그는 국전에 출품하고 입선하는 것에 큰 의미를 두었던 그간의 창작활동에 환멸을 느끼고 돌연 프랑스 유학길에 오르기로 결심한다. 그에게는 한성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서 안정적인 직장도 있었고, 1969년에는 결혼도 했던 터라 유학을 떠난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을 것이다.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73년, 그는 신세계백화점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그 스스로 그간의 작업을 정리하고 1975년 유학길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보면 오늘날 그의 미술계의 위상은 아마도 그러한 낙선의 고배가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이 프랑스 유학을 통해 오히려 그는 한국적인 그림을 그려보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불교는 여기서도 한국적인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화가에게 중요한 민족문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불교가 단순히 한국적인 것을 이야기할 때의 소재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스스로를 표현하는데 있어 내재된 본질적인 요소는 개인적인 것도 있겠지만 오랜 기간 습득된 문화적 전통이라는 것이 우리 안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내면 세계를 표출하고자 하면 그 안에 역사와 문화도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밖에 없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 불교적인 모티프였던 셈이다.

그의 2002년작 ‘월인천강’은 반가사유상을 중앙에 두고 그 주변으로는 ‘일월오봉도’ 같은 궁중전통회화를 모티프로 그려진 산과 강에 달이 떠있다. 다만 ‘일(日)’, 즉 해 대신에 달만 두개가 떠있는데 ‘월인천강’의 주제에 맞춰 천개의 강, 즉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구별하지 않고 두루 비치는 달을 강조한 것이다. 중앙의 반가사유상은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반가사유상이라 할만하다. 미술사의 흐름에서 불상은 점차 덜어내고 덜어내는 과정에서 단순한 형태로 다듬어져 온 긴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불상은 그런 측면에서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는 불상의 가장 요체만을 남긴 무색무취의 단계에 이른 불상들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만익의 보살상은 더 이상 단순해질 수 없을 것 같은 한국의 불상 표현을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캐릭터화된 관음보살로 재탄생시켰다. 조금 더 강조하자면 마치 이모티콘처럼 디지털화되고 아이콘화된 보살이라고나 할까. 비슷한 의미에서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아기부처’는 국립경주박물관의 삼화령 삼존불상의 협시보살상을 아이콘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이모티콘의 의미처럼 신라인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졌을지도 모른다.

거기에 광배를 대신하여 월인천강의 달빛이 배경에 펼쳐진 것은 수월관음도의 배경이 된 포탈락가산 위에 떠오른 둥근 달이 이제는 사방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표현함으로써 그 자체로서 광배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흔히 그의 색채는 오방색을 원용한 것이라 하지만, 그는 오방색도 마치 LED 조명처럼 사용하고 있다. 어쩌면 스마트폰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가장 친숙할 수 있을 디지털 불화의 프로토 타입은 2000년대 초에 이미 이렇게 준비되고 있었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74호 / 2021년 2월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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