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정총림 방장 지유 스님 경자년 동안거 해제 법어

  • 교계
  • 입력 2021.02.27 14:06
  • 수정 2021.02.27 14:25
  • 호수 1575
  • 댓글 0

사람이 어디를 가다가 누구를 만나면 서로 주고받는 인사가 있습니다. “안녕하셨습니까?” “반갑습니다.” 이렇게 하듯이 우리 승가에서도 승려끼리 만나면 서로 인사의 말을 주고받곤 했었습니다. 승려들은 어떻게 인사하는가 하면 “그동안 정진 잘하셨습니까?”라고 합니다. 공부를 잘했느냐 이겁니다. 공부를 잘못하고 잘하고 하는데 전부 신경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보다 법랍이 높은 큰스님을 만나면 “법체 안강 하셨습니까?”라고 인사를 올렸습니다. 육체라고 하지 않고 법을 담고 있는 몸이기 때문에 법체라고 하였습니다. 그 법체란 곧 마음을 가리킨 것입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코로나로 인해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고 자칫 잘못하면 나의 몸에 병이 들어올까 걱정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인다면 막으면 되고 덜어내면 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서 어느 틈에 어떻게 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듯이 또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병균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생로병사의 근본이 되는 번뇌망상입니다.

사람들은 편안하다, 혹은 괴롭다고 표현합니다. 번뇌가 많은 사람은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무엇을 하더라도 불안하고 답답하고 괴로울 것입니다. 번뇌가 없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보고 듣고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불안한 것, 괴로운 것이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괴로운 사람과 괴롭지 못한 사람은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한마음으로 인해 한없는 번뇌를 일으키면 중생이고 그 한마음을 깨달아서 한없는 묘용을 일으킨 자가 모든 부처님이다. 깨닫고 깨닫지 않는 것은 다르지만 요는 한마음에 달려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성불하겠다, 깨달아야 하겠다, 부처가 되겠다고 하는 것도 마음을 떠나서 부처가 되려고 하면 대단히 잘못입니다.

선문에 보면 보조 국사께서도 젊은 시절부터 육신의 몸을 던져서 온 사방에 선방에 두루 돌아다니면서 부처님과 옛 조사께서 자비심을 일으키어 모든 중생을 위하여 설하신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속의 모든 거치적거리는 반연을 씻어버리고,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계합하려면 바깥으로 구하지 말아라.” 이렇게 찾으신 것입니다.

경전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부처님의 세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마음속의 생각을 허공과 같이 깨끗이 하여라. 그리고 모든 쓸데없는 생각, 이것이냐 저것이냐 바깥으로 쫓아다니는 생각을 멀리 여의고 마음으로 하여금 향하는 바에 걸림이 없도록 하라.” 이 말씀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그동안 깨닫기 위해, 자기 마음을 알기 위해 선원에서 특별히 화두 공안을 들었든지, 또는 염불 기도를 했다든지, 각가지 수행 방법으로 정진했습니다. 그 수행 결과 자신이 목적했던 깨달음을 터득했다면 얼마나 반갑고 좋은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이 게으름을 피운 것도 아니고 밤에 잠도 자지 않고 이렇게 애를 썼는데도 왜 깨달아지지 않는지, 내가 들고 있는 화두 공안을 왜 아직 터득하지 못했는지 의구심이 생깁니다. 이럴 때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마음을 딱 비워버려라.” 이 말씀을 절실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태까지 천사량 만사량 이렇게도 생각하고 저렇게도 생각하며 갖은 용을 쓰고 애를 썼습니다. 결과는 피곤한 것만 돌아왔지 내가 구하는 진리, 도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그림자도 안보입니다. 그렇다 보니까 ‘혹시 내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거 조사 스님들은 어떻게 도를 깨닫고 터득하셨는지 한번 살펴봐야 하겠다.’ 이렇게 스스로 돌이켜 보는 겁니다.

자신이 염불했든 기도를 했든 화두를 들었든 일단 놓고서 마음을 텅 비워봅니다. 조용히 모든 생각을 쉬어서 다 가라앉으면 거기서 딱 여태까지 눈앞에 놔두고도 보지 못했던 그 이치가 눈앞에 보입니다. 그래서 허심(虛心). 마음을 비우라는 겁니다. 그리고 명계(冥契), 시끄럽지 않고 조용히 계합된다고 합니다. 이 ‘조용히’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를 든다면, 옛날 시계는 초를 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초 소리가 낮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밤이 되고 앉아서 좌선하고 있으면 유달리 기둥에 걸린 시계 소리가 시끄럽습니다. 그 시계가 낮에는 소리를 적게 치고 밤에는 크게 쳤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소리는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낮에는 들리지 않고 밤에는 왜 이렇게 잘 들리는가. 그거야 뻔한 이칩니다. 낮에는 사방의 온갖 잡된 소음에 가려져서 소리가 들리지 않은 것인데 밤에는 모든 것이 조용했기 때문에 귀에 들린 것입니다.

그와 같이 의심을 하고 갖은 애를 쓴 것은 잡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랬던 것이 고요히 놓고 보면 모든 잡음이, 잡념이 가라앉습니다. 우리 앞에 푸른 산이 있다든지 단풍이 있다든지 좋은 경치가 있더라도 안개가 가린다든지 요즘처럼 미세먼지가 가린다면 보이겠습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보였다면 미세먼지도 없어졌고 안개도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이치와 똑같습니다.

모든 생각에 가려서 내가 깨닫지 못했던 것이 모든 생각을 놓고 보니까 매일같이 종소리, 목탁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 진짜 그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생각을 쉬고 보니까 목탁 소리가 나자마자, 종소리가 나자마자 옛 선사가 “종소리 듣고 깨달았다.”라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됩니다. 종소리를 들으면 누가 먼저 알아차립니까? 자신입니다. 자신을 여기 두고 미친 듯이 내가 어디 있는가 하고 구하고 돌아다닌 것입니다. 구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잘못이라는 겁니다.

‘임제록’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구하면 구할수록 멀어지고, 찾으면 찾을수록 거리가 떨어진다. 찾지 말아라. 구하지 말아라. 딱 되었다. 거기 네가 있다. 왜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가?”
‘자기를 놔두고 자기를 찾고 있었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찾는다고 하는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배고프면 밥 먹으면 되는 것이고, 목마르면 물 마시면 되는 것이고, 예불할 때 예불하면 되는 것이고, 운력이 있으면 운력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피곤하면 쉬고, 그렇지 않으면 움직이고, 어떤 상황에서든 싫다, 좋다 따지지 않고 그대로 적응해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 자체는 희지도 검지도 않지만 흰 것이 오면 보기 싫다고 거부하거나 검은 것이 왔다고 해서 특별히 좋아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줍니다. 받아주지만 거울 속에는 흰색이 오면 흰색뿐입니다. 또 검은 것이 오면 거울 전체가 검게 됩니다. 거울 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검게 물들거나 희게 물들지도 않습니다. 지나고 나면 검은 흔적도 없고 흰 흔적도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런 이치를 깨닫게 되면 스스로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습니다. 중생의 마음은 세 가지로 구분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자기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항상 번뇌만상 속의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치 진흙 속으로 걸어가는 발자국과 같다고 합니다. 발자국이 도장을 찍은 것처럼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지나갔는데도 좋은 일이 자기 마음을 가리고 있고,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이미 지나갔는데도 마음속에 ‘감히 그놈이 감히 그럴 수 있는가.’ 하며 가슴에 도장을 찍은 것처럼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이것이 일반 범부의 가장 낮은 경계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공부에 좀 진척이 있고 잘 되어 나가면 중간쯤 비유를 호수에 오리가 지나가는 모습과 같다고 합니다. 호수에 오리가 지나가면 처음에는 파도 일어나지만 시간 지나면 흔적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이 들고 날고 하지만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흔적이 하나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가장 통달한 사람은 허공을 나는 새가 흔적이 없는 모습과 같습니다. 지금 당장 누구와 싸우고 온갖 모습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지나가고 나면 흔적도 없습니다. 보통은 진흙 속에 발자국이 남아 있듯이 두고두고 남아 있습니다. 조금 나은 사람은 마음이 울퉁불퉁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싹 사라집니다. 그런데 선사는 즉시 없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자신의 마음은 이 세 가지 중 어디에 해당하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못한 점이 있으면 빨리 고쳐야 합니다. 게을러서 알면서도 고치지 않으면 점점 커져서 큰 병이 됩니다. 마음속 번뇌망상이 코로나보다 무섭습니다. 누군가 잘못한 것을 일러주면 고맙다며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기는커녕 자기에게 주의시킨다고 화를 내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렇게 같은 도반들끼리 살면서 남이 잘못하는 것이 있으면 일러주고 고치도록 하는 것이 탁마상승(琢磨相乘)입니다. 인심을 잃어버릴까 입을 다물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대중이 함께 공부하고 수행하다 보면 잘못한 것도 있고 잘한 것도 있습니다. 잘못했다고 하면 서로 걱정하고 자기 혼자 힘으로 안 되면 여럿의 힘으로라도 고쳐 나가야 합니다. 어느날 출발해서 지금까지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자기가 걱정해야 하고 모르면 누구에게 물어보고 일러주면 아주 고맙다고 받아들이고 해야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롭고, 자리이타(自利利他),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면 안 된다고 하니 오늘은 이정도로 마치겠습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2월26일 금정총림 범어사 보제루에서 봉행된 ‘경자년 동안거 해제 법회’에서 금정총림 방장 지유 스님이 설한 내용입니다.
 

[1575호 / 2021년 3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