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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제54칙 풍혈주록(風穴麈鹿)

깨달음 경지에 도달해도 언덕은 그대로 언덕일뿐

승이 질문한 우두머리 큰 사슴은
풍혈 모습이며 또한 납자의 미래 
우두머리 사슴 잡는 법이 아니라
우두머리 사슴을 아는 것이 중요

승이 풍혈에게 물었다. “큰사슴[麈鹿]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경우에 어찌해야 우두머리[主中主]를 쏘아 맞힐 수가 있습니까.” 풍혈이 말했다. “낚싯배를 저어서 소상강의 언덕에 도착해보니, 숨이 막히고 무료하여 해오라기에게 물어본다”

일반적으로 법거량으로 제기되는 스승과 제자의 문답에서 의기투합하여 마치 상자와 뚜껑이 딱 들어맞는 경우라면 서로 찻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자연스럽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고 생뚱맞게 동문서답으로 전개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답의 본래의도로부터 동떨어진 결과가 초래되어 깨달음의 기회가 언제 도달할지 기약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선문답은 가장 사소한 문제처럼 보일지라도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일상의 사소한 생활의 낱낱 행위가 그대로 수행이고 깨달음이며 자기의 삶의 모습으로 남게 된다. 그래서 문답하고 있는 이치가 지극히 순수한 경우라면 어떤 사려분별이라도 눈꼽만치도 발붙이지 못하겠지만, 처음부터 어떤 의도를 가지고 스승의 의중을 떠보려고 한다든가 자신의 선기를 자랑하고 싶다든가 하는 것이라면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는 정 반대 방향의 결론으로 치닫게 되고 만다.

본 문답에서 승이 질문한 내용 가운데 나오는 큰사슴에 해당하는 원어는 주록(麈鹿)이다. 주록은 사슴의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우두머리가 앞장을 서면 사슴무리가 그 뒤를 따르는데 모두 우두머리의 꼬리가 지시하는 방향을 보고 그 지시를 따라 나아간다. 그래서 예로부터 설법을 할 경우에는 불자(拂子) 곧 주(麈)를 치켜올린다든가 혹은 그것을 휘둘러댄 것도 그런대로 까닭이 있었다.

그리고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원어는 주중주(主中主)이다. 주중주는 가장 핵심이 되는 존재로서 예로부터 지도자를 의미하는 황제 내지 스승을 가리켰다. 큰사슴만 해도 보통의 사슴보다 한결 뛰어난 존재를 가리키는데, 그 가운데서도 다시 최고의 사슴이 지니고 있는 경지를 터득하려면 어떤 화살을 골라야 하고 어떻게 활을 쏘고 어떤 사슴을 선택해야 하고 몇 번이나 활을 쏘아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이미 질문을 하고 있는 승은 제법 안목을 갖추고 있는 납자이기에 큰사슴과 우두머리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었다.

승의 말마따나 사슴의 무리처럼 축생마저도 오히려 존비(尊卑)가 있는데 수행정진하는 납자에게 어찌 상하(上下)의 구분이 없겠는가. 여기에서 상하를 구분하는 것은 수행하며 정진하는 모습과 깨침의 정도에 따른 구별을 의미한다. 승의 질문에 대하여 풍혈연소(風穴延沼, 896~972)는 이미 존비를 이해하고 상하를 분별하고 있었다. 승의 질문 가운데에는 이미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인물의 모습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것은 승이 나아가고자 하는 미래의 모습이면서 현재 풍혈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풍혈은 ‘낚싯배를 저어서 소상강의 언덕에 도착해보니, 숨이 막히고 무료하여 해오라기에게 물어본다’고 답변하였다. 낚싯배는 풍혈이 지금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서 조실로서 납자들을 이끌어주고 교화하여 깨침으로 나아가게 해준 수단이고 방편을 의미한다. 풍혈은 납자들마다 각자 가장 적절하게 효과를 달성하는 방편으로 응수해준 모습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풍혈은 자신이 결국 깨치고 보니 어떤 새로운 것이 없이 여전히 배를 대는 언덕은 그대로 언덕일 뿐이었다. 차라리 무심한 해오라기에 의탁하여 자신의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 좋았을 것이다. 이에 승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우두머리를 잡는 방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두머리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는 것을 터득하였다. 바로 자기에게 답변해주는 말 언저리, 나아가 면전에 앉아계시는 조사의 면모에서 작은 낌새라도 자각할 수가 있었다. 승이 자각한 모습은 다름아닌 자기의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자기였다.

김호귀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 kimhogui@hanmail.net

 

[1575호 / 2021년 3월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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