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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객 각전 스님

“성지순례는 균열된 신심과 꺼져가는 불심을 되살려줍니다” 

서울대서 정치학 전공
행시 패스 후 잠시 공직

궁극 진리 찾기 위해
범어사서 삭발염의

아잔타 연화수보살
친견하며 자비 체득

‘부처 삶’ 도저한 천착으로
쓴 ‘인도네팔순례기’ 역작

아잔타·엘로라·산치대탑
관통하는 자타카 ‘압권’

부처님 그리울 때
책 열면 환희 충만

“비교 습관 멈춰 보시라!
내 안 행복 건질 수 있어” 

각전 스님은 “일상에 젖고 세파에 흔들리다 보면 단단할 것만 같았던 신심에 균열이 난다”며 “그때, 우리는 부처님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푸른빛 나는 보석이 박힌 보관을 쓰고, 목걸이를 하고, 허리와 목을 꺾은 삼곡(三曲) 자세를 취해 부처님을 시봉하고, 왼쪽 팔뚝에는 끈을 묶어 고귀함을 상징하고, 오른쪽 손에는 하얀 연꽃을 들고 아래를 그윽하게 내려다보시는 보살의 시선은 거룩한 침묵 속에서, 온 중생들을 연민해 마지않는 대비(大悲)의 모습 그 자체이다.’(각전 스님 저서 ‘인도 네팔 순례기’ 중)

‘인도 서부 아우랑가바드(Aurangabad)의 아잔타 석굴(Ajanta Caves)에 들어섰다. 가로 35.7m, 세로 27.6m 규모의 제1굴. 중앙광장을 둘러싼 20개의 기둥과 천장, 벽면에는 자타카(jātaka·부처님 본생경)를 소재로 한 부조와 벽화들로 가득했다. 선염법(渲染法)으로 표출된 화려한 색감에 생동감마저 더해진 고대 벽화의 웅장함에 사로잡힐 만도 한데 무소의 뿔처럼 더 깊이 들어갔다. 

석실 입구 맞은편에 위치한 벽화 두 점! 대자대비(大慈大悲)·선정지혜(禪定智慧)를 농축시킨, ‘인도 고대미술의 보고 아잔타’라는 명성을 안겨준 그 연화수(蓮華手·Padmapani)·금강장(金剛藏·Vajragarba) 보살도다. 시선은 왼쪽 벽면의 연화수보살도에 한없이 머물렀다. 
 

아잔타 석굴의 연화수보살도.

고등학교 교실. 누가 갖다 놓았는지 화집 한 권이 자신의 책상에 올려 있기에 무심코 열었다. 그윽한 시선, 거룩한 침묵! 화보 속 보살은 청년의 온 마음을 통째로 뒤흔들었다. 불교에 대한 교리·지식이 전무 했음에도 한 생각이 스쳐갔다.

‘부처님이나 성인은 저런 풍모를 지니셨구나!’

너무도 강렬했던 그 첫 인상 가슴에서 떠난 적이 없다. 

민주화 물결이 도도히 흐르던 시대에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후 칼 마르크스(Karl Marx)를 만났다. 잉여와 착취,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모순을 설파한 ‘자본론’을 들여다보았지만 현실과 이상 사이서 일어나는 괴리로 인해 내적 갈등은 깊어져만 갔다. 심적 방랑을 잡아줄 부동의 진리가 필요했다. 성서와 도경을 펼쳤지만 답을 얻지 못했는데, 대학 4학년 때 접한 불경에서 ‘진리의 사다리’를 발견했다. 출가하려는 마음이 처음 인 건 그 때였다.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해양수산부라는 굵직한 기관에서 근무했다. 6개월쯤 흘렀을까?   

‘출가하자!’

부처님께서 왕성을 떠나 길을 걸었듯, ‘궁극의 진리’를 향해 걷고 또 걷고 싶었다. 그 길 끝에서 직면할 게 무엇인지가 궁금할 뿐이었다.  뒤늦게 출가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님 가슴에는 태산보다 무거운 바위가 앉았다. 어머니가 범어사로 찾아왔지만 돌아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중국 도안(道安) 법사의 유계(遺誡)가 전한 그 ‘의지’ 굳건했음이다.

‘그대 이미 출가하여 태어난 바 어기고는, 머리 깎아 모습 헐고 법복 몸에 걸쳤구나, 어버이를 버리던 날 위아래가 울음바다, 애욕 끊고 도(道) 받드니 그 의지는 하늘이라.’

범어사 대정 스님(1931∼2021)을 은사로 산문에 들었다. 범어사 강원을 졸업한 후 쌍계사, 범어사, 직지사, 통도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했다. 

2012년 인도 성지순례를 처음 다녀왔다. 부처님께서 남기신 향훈을 직접 느낄 수 있어 좋았는데 뭔가 허전했다. 불교의 원천인 인도역사·철학·미술에 천착해 초기·대승불교를 되짚어가며 좀 더 촘촘히 꿰어갔다. 2년 후인 2014년 다시 성지순례를 떠난 것인데 아잔타 석굴을 첫 일정으로 잡았다. 고교시절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연화수보살 앞에 삭발염의하고 선 것이다. 30여년 만의 일이다. 

인도 고대미술의 보고인 아잔타 석굴에 이어 34개의 석굴마다 불교·힌두교·자이나교의 정취가 뚜렷이 드러난 엘로라 석굴, 인도 아소카왕이 세운 탑 중 가장 아름다운 산치대탑을 꼼꼼히 살폈다. 순례는 부처님 최초 설법지 사르나트와 깨달음의 보드가야를 거쳐 열반의 땅 쿠시나가르, 탄생지 룸비니로 이어졌고, 히말라야 속의 네팔에서 마무리 됐다.
 

'인도 네팔 순례기'

인도 대륙의 데칸고원 서쪽에서 갠지스강 동쪽을 거쳐 히말라야에 이르는 그 여정을 ‘인도 네팔 순례기’(민족사)에 올곧이 담아 2020년 12월 출간했다. 순례에서 돌아온 직후 원고를 쓰기 시작해 3개월 만에 초고를 완성했는데, 두문불출한 채 하루 한 끼 반(과일) 공양으로 버티며 집필한 결과다. 벽화, 조각, 건축이 함축한 독창적 양식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든 부처님 전생과 생애, 말씀을 유려한 필치로 써 내려갔다. 방대한 양의 유물유적 사진은 모두 각전 스님이 촬영한 것인데 투박해 보이지만 불심의 앵글로 잡아낸 ‘작품’이다. 초기·대승 경전과 고서·논문 등을 넘나들며 전한 상세한 설명에 책은 668쪽에 이를 만큼 두꺼워졌다.

한역·팔리어·산스크리트어·티베트어 등으로 번역된 자타카는 900편이 넘는데 중복된 것을 제외하면 547편이다. 각전 스님은 여느 답사·순례기에서는 보기 어려운 ‘자타카’를 밀도 있게 그려냈는데, 아잔타·엘로라 석굴과 산치대탑을 관통하는 그 이야기들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주고 있다.

“자타카에 빠져들다 보면 나 외의 꽃, 나무, 원숭이 같은 뭇 생명의 소중함을 새롭게 인식합니다. 선인락과(善因樂果)·악인고과(惡因苦果)가 절절이 다가오기에 ‘아, 지금처럼 살면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기도 합니다.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비유로 가득한 자타카는 부처님의 전·현생에 흥미를 돋게하고 감동케하여 그 속에 담긴 지혜를 깨우치도록 유도합니다. 인간의 심성을 단 시간 내에 순화시키는 힘이 자타카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아잔타·엘로라 석굴만도 60여개인데 불교·힌두교·자이나교 작품들이 혼재되어 있다. 교학에 해박하지 않으면 구분조차 어려울 터인데 난다 삭발도, 육아백상(六牙白象)도, 사마 본생도 등은 물론 연등부처님 발밑의 머리 풀어 절하는 선혜보살, 석가모니부처님에게 유산을 달라는 라훌라 등의 작은 조각까지 포착했다. 
 

최초의 불탑 산치대탑.

최초의 불탑인 산치대탑에 이르러서는 학술탐사하듯 파헤쳐 갔다. 들보와 기둥에 표현된 부조들을 일일이 관찰한 후 ‘산치탑문 부조 전체·상세표’를 작성해 냈고, 부조 배치에 담긴 의미 및 부처님 생애와의 상관성을 고찰했다. ‘소논문’이라고 해도 좋을 ‘보록’은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했다. 산치대탑 북문의 기둥과 들보에 표현된 ‘배산타라 본생담’에 유독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배산타라 왕자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집에 무엇이 있습니까? 저는 보시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나눔에 남다른 원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뭄에 힘겨워하는 이웃나라 바라문들의 청으로 자신과 함께 태어난 비 내리는 코끼리를 빌려 주었다가 왕국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700마리씩의 코끼리, 말, 소, 700대의 마차, 700가지의 음식 등을 보시한 왕자입니다. 배산타라 왕자의 생을 마지막으로 고타마 싯다르타로 태어나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 앉아 깨달으셨습니다. 이처럼 성불과 이타행은 자신이 마주한 고난을 팔정도 육바라밀로 슬기롭게 극복할 때 실현될 수 있음을 자타카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가지 유념에 두어야 할 건 적멸에 드신 부처님을 향한 그리움, 그 가르침을 기억하려는 마음이 ‘자타카’를 빚었다는 사실입니다.”
 

산치대탑 북문의 들보에 부조된 ‘배산타라 본생담’.

석굴과 산치대탑은 물론 사르나트, 보드가야, 룸비니 등의 성지에서 예불을 올린 것도 부처님의 삶과 법을 마음에 되새기며 ‘이 몸을 바쳐 불도를 이루겠다’는 원력을 다져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4대 성지를 믿음 있는 사람들이 친견해야 할 장소로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성스럽기 때문에 가야 할 장소가 아니라 절박함을 일으켜야 하는 장소로 제시하셨습니다. 온갖 고(苦)를 떨치고 일어서려는 의지의 사무침이 절박함입니다. 수행자로 거듭나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그 간절함입니다.”

중국 동진(東晋)의 법현(法顯), 당(唐)의 현장(玄奘·602?∼664), 신라의 혜초(慧超·704∼787) 스님도 절박했기에 인도로 길을 떠났었다. 인도로 떠난 중국 최초의 승려로 기록된 법현 스님이 길을 떠나(399?) 지금의 아프카니스탄, 카슈미르,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에 도착(402?)했을 때는 세납 60살을 훌쩍 넘긴 것으로 전해진다. 그 여정이 어찌했을 지는 저서 ‘불국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하늘에는 새가 없고, 땅에는 짐승이 없다. 오직 앞서간 사람들의 뼈와 해골이 이정표다.’

“법현 스님은 불타 버린 기원정사의 7층 건물을 기록하면서, 함께 왔던 도반들 중 ‘그냥 돌아간 사람과 도중에 불귀의 객이 된 사람이 있는 것을 가슴 아파하면서 또한 세존께서 계시지 않음에 슬퍼함을 금할 수 없다’고 토로하셨습니다. 부처님을 향한 그리움의 사무침이 전해져 옵니다.”

궁극의 진리를 찾아 출가한 스님에게 부다가야는 여느 성지보다 더 특별했을 터다. 그 감회가 궁금했다.

“저의 전부입니다!”

성지에서 새삼 새겨 본 법음을 청했다. 

“사르나트(녹야원)에서는 아늑했고 평화로웠습니다. 정각을 이루신 부처님께서는 그곳에서 첫 사자후를 토해내셨습니다. ‘비구들이여, 두 극단을 버려라!’”

불교의 경전·역사·문화에 대한 도저한 천착으로 부처님이 전하신 뜻을 풀어낸 이 순례기는 역작이다. ‘부처님의 삶, 나의 존귀함을 찾는 길’이라 붙인 부제처럼 자신의 삶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고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을 찾도록 이끌고 있는데, 변화를 일으키는 힘은 단연 ‘신심’에서 솟아날 터다. 

“부처님 법에 따라 살고자 해도 일상에 젖고 세파에 흔들리다 보면 단단할 것만 같았던 신심에 균열이 납니다. 그때, 우리는 부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인도의 성지로 향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습니다.”

코로나19로 지금, 아니 당분간은 인도로 떠나기 어렵다. 다행스럽게도 ‘인도 네팔 순례기’는 그 아쉬움과 허전함을 채워주고도 남는다. 

각전 스님은 현재 경주의 산 중턱에 자리한 작은 토굴에 머무르고 있다. 혼자만의 공간에서 정진하는 건 출가 후 처음이라고 한다. 향후 계획을 여쭈니 “성지에 스민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강연에 나서보겠다”며 “집필 시간도 가져보려 한다”고 했다. 선원 수좌가 짚어가는 출세간의 이야기에 기대감이 커진다. ‘행복 이르는 길’ 묘책 하나를 청했다.

“저도 묘책은 없습니다. 다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전해드릴 수 있습니다. 비교하려는 마음을 멈춰 보세요.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길이 열립니다. 행복은 거기서 건져낼 수 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역대 선지식이 증명했습니다.”

순례 길에서 얻은 ‘보물’을 여쭈니 ‘환한 미소’만 보였다. ‘인도 네팔 순례기’에 담긴 연화수보살도 소감에 그 답의 실마리가 있을 법하다.

‘잔잔하고 고요하면서 한량없는 중생들의 고된 삶을 측은해하는 보살의 모습으로 자꾸만 빨려간다. 내세움 없이 오히려 반걸음 물러선 듯, 그러나 중생을 위하는 크나 큰 마음을 끝없이 발산하고 계신 분!’

이 지상에 울릴 각전 스님의 숭고한 법음에 귀 기울여 봄직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각전 스님은
서울대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39회 행정고시 합격, 해양수산부에서 근무하다 대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범어사 강원을 졸업한 후 직지사 등 제방선원에서 정진했다. ‘해인’지 편집장을 맡기도 했던 스님은 현재 경주의 산 중턱 토굴에서 정진하고 있다.
 

[1579호 / 2021년 3월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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