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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법(法): 부처님의 가르침

실체론적 사유를 연기론적 사유 방식으로 전환

교리 공부 이전에 부처님 가르침 성격과 특징 이해하는 게 우선
불교는 개념적인 사고의 산물 아냐…경험에 대한 직접적인 고찰
바깥 세계 보는 우리의 지각과 인지 작용이 오온·십이처·십팔계 

석가모니 초전법륜상. 5세기. 사르나트 고고학박물관 소장.
석가모니 초전법륜상. 5세기. 사르나트 고고학박물관 소장.

그간 부처님 출현의 문명사적 의미를 중심으로 삼보(三寶)의 첫 번째인 불(佛)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연재부터는 삼보의 두 번째인 법(法)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불교는 ‘가르침’을 그 중심에 놓고 있는 종교입니다. 철학적 종교 혹은 이법(理法)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교와 같은 계시의 종교가 ‘믿음’을 신앙의 핵심으로 한다면 불교는 ‘가르침’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불교에 입문한다는 것은 곧 삼법인, 연기법, 사성제 등 불교의 기본교리를 공부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간 불교를 공부하고 또 가르쳐 온 제 경험으로 볼 때 교리를 공부하기 이전에 부처님이 펴셨던 ‘가르침’의 성격과 특징들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 바탕위에서 바라볼 때 불교의 기본교리에 대한 이해가 보다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한국불교인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경전과 교리에 대한 지적(知的) 이해를 ‘알음알이’라는 말로 경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지적이해는 일상적 신행에서만이 아니라 깨달음을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연재를 시작하면서 지식불교의 폐해를 말씀드렸던 것은 지적이해가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고 지적만족으로 끝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흔히 ‘온화한 급진주의’라고 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친절하게 가르침을 폈기 때문에 ‘온화’라고 하지만 그 내용은 당시의 통념적 사고를 완전히 전복(顚覆)하는 혁명적 전환이었기 때문에 ‘급진’이라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χ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무엇을 χ라 하는가”의 질문으로 전환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히 주어와 술어를 뒤바꾼 것이 아니라 존재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그 근원에서부터 흔들어 버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실체론적 사유에서 연기론적 사유로의 전환이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실체론적인 사유방식에 매우 익숙합니다. 이를테면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등의 질문들은 사물과 존재의 본질을 전제하는 실체론적 사유로부터 출발하는 것들입니다. 동서고금의 많은 인문교양서들이 이런 질문에 답을 내놓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모두를 만족 시킬 답은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대답 불가능한 질문들입니다. 모든 경우를 다 포괄할 수 있는 ‘인간’ 혹은 ‘사랑’에 대한 보편적 답을 찾는 것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모든 경우를 다 함축할 수 있는 본질을 찾는 것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질문을 연기론적인 질문으로 전환 하셨습니다. ‘무엇을 인간이라고 하느냐.’ 이러한 질문은 맥락에 따라 다양한 답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답들은 각기 맥락적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유익함의 여부입니다.

실체론적 사고를 연기론적 사고로 전환한 대표적 예가 바로 오온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온설은 ‘나란 무엇인가’라는 실체론적 사유를 거부하고 ‘무엇을 나라고 하는가’라는 사유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또한 오온설은 ‘나’에 대한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나라고 하는 경험’을 고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두 번째 특징이 바로 경험을 직접 고찰하는 데 있습니다.

서양 고대철학을 비롯해서 근현대 철학에서 주된 작업방식은 존재와 사물에 대한 추상화입니다. 서양철학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인 ‘본질’ ‘자아’ ‘실체’ ‘속성’ ‘주관’ ‘객관’ ‘존재’ 등은 사물과 존재에 대한 추상적 사고의 결과물로서 우리가 개념이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방식의 철학이 잘못됐다든가 틀렸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서의 용어들과 그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흔히 서양철학자들이 무아설을 비판하면서 자아(自我)가 없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불교에서 부정하는 아(我)가 서양철학에서의 자아와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이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아의 중요성을 전제하고 있는 철학사상에 대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곤란하다는 말씀입니다. 무아 그리고 오온설에 관해서는 다음 연재에서 상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한편 부처님 가르침이 개념적 사고의 산물이 아니라 경험에 대한 직접 고찰이라는 점과 직결된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자주 등장하는 ‘일체’ 등에 대한 이해입니다. 흔히 서양철학의 ‘세계’라는 개념과 불교의 ‘일체’를 동의어처럼 이해하는 경우가 많지만 두 용어는 다소 의미의 중첩은 있겠지만 각자의 체계 내에서 지시하는 바는 결코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서양철학에서 세계란, 마르쿠스 가브리엘(Markus Gabriel, 1980~)의 표현에 따르면 “세계란 우리가 없이도 존재하는 어떤 것, 혹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세계’를 뜻하는 일체 혹은 만법(萬法)이 의미하는 것은 나의 경험 세계를 말합니다. ‘중생의 수만큼 세계가 존재한다’고 하는 말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존재, 그리고 세계란 곧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결코 관념론적 세계관이 아닙니다. 부처님에 있어 ‘경험’이란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는 관념적 활동이 아니라 바깥 세계와의 교류의 산물입니다. 지각과 인지를 통해 바깥 세계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과 함께 우리는 매번 새롭게 창조됩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에 대한 부처님 가르침은 바로 이러한 바깥 세계와 우리의 지각과 인지 작용의 상호 작용에 대한 것들입니다. 이는 리차드 곰브리치(Richard Gombrich) 교수가 지적하고 있듯이 오늘날 우리가 인지심리학이라 부르는 그러한 작업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성택 고려대 철학과 교수 stcho@korea.ac.kr

[1580호 / 2021년 4월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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