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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순진무구의 화가 최영림 : 내가 부처가 된다면

기자명 주수완

‘귀욤’양식으로 표현한 순진무구한 부처님

작품에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도 표현한 듯 
전통적 부처 표현 방법 계승했지만 독특한 이미지로 구현
삼존불 변형한 ‘불심’은 마치 눈동자에 비친 영상으로 보여

전통적인 수인의 부처이지만 마치 실제로 우리에게 말을 거는 듯한 최영림 화백의 ‘불(佛)’. 목판화.

현대 불교미술의 트랜드라고 한다면 ‘귀욤’이 아닐까. 원래는 동자승을 귀엽게 만든 인형같은 조각상들이 사찰 기념품점이나 혹은 탑 기단 위에 슬그머니 올라가 있더니 점차 부처님까지도 귀엽게 만들어 캐릭터화되고 있다. 물론 아직도 불단 위에 모시고 예불드리는 불상은 조선시대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이 시대에 등장한 ‘귀욤’ 양식은 아직 전면에 나서지는 않고 다만 사람들이 불교를 더 친근하게 생각하고 다가설 수 있도록 하는 홍보용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를 불교미술이라고까지 불러야할지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앞서도 살펴본 것처럼, 경주 삼화령 미륵세존으로 알려진 삼존불상의 협시보살상 같은 경우는 신라시대에도 ‘귀욤’ 양식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때문에 언젠가는 ‘귀욤’ 양식이 대세가 되어 불단까지도 점령하게 될지 모른다. 필자는 그런 상황을 우려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단지 ‘귀욤’이 대세라는 이유만으로 불상양식도 그 대세를 무분별하게 따르는 것은 자칫 불교의 가르침마저도 왜곡될 수 있으므로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지금의 ‘귀욤’ 양식의 불교미술은 서양화가 최영림(崔榮林, 1916~1985)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둥글고 큰 얼굴, 앳되고 순진무구한 인물표현은 지금의 ‘귀욤’ 양식미술과 닮은 점이 많다. 차이점이 있다면 최영림의 작품 속 인물들은 귀엽게 보이고자 하는 의도가 없는데도 귀엽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더더욱 순진무구하게 보인다. 또한 자칫 ‘귀욤’ 양식은 철이 없어 아무 것도 모르는 ‘귀욤’에 그칠 수 있지만, 최영림의 ‘귀욤’은 행복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해야하기 때문에 행복한, 그래서 때로는 슬픔과 달관의 위로도 줄 수 있는 귀여움이다.

평양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한 이후 화가로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했다. 1938년에는 평양박물관에서 근무하던 오노 타다아키라(小野忠明)의 소개로 일본의 태평양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무나가타 시코(棟方志功)로부터 목판화를 배우기도 했다. 이 덕분에 그는 판화를 중시하고 목판화 작업도 활발히 이어갔다. 귀국 후에는 평양에 머물며 조선미술전람회에 꾸준히 출품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지만 해방 후 공산화된 사회에서는 창작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해 결국 한국전쟁 중에 남쪽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 그는 가족들을 평양에 남겨둔 채 홀로 월남했는데, 전쟁 후에도 결국 남북이 분단된 상태가 이어지자 이산가족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평생 마음 한 구석에 애절한 그리움으로 남게 되었다. 그림 속 여성과 아이들은 바로 이런 그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

‘불심’, 1970년, 116×116㎝(왼쪽) 및 ‘불심’, 1967년, 90×130㎝(오른쪽).

우선 그의 판화 속 부처를 살펴보면, 전통적인 판화 속 부처의 표현 방법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판화의 특성을 강조한 음영의 대비와 거칠게 꺾인 윤곽선의 처리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부처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만의 독특한 부처 이미지를 만들어냈는데, 마치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미묘한 움직임이 그것이다. 서있는 부처의 경우 전통적인 개념으로는 오른손으로 시무외인 혹은 설법인이라고 하는 수인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불교미술에서는 대체로 오른팔을 바깥으로 뻗어서 몸 밖으로 표현하거나 아니면 앞으로만 내민 모습인데, 여기서는 몸 가운데 쪽 앞으로 손을 내밀고 있다. 이렇게 하고나니 마치 지금 바로 내 앞에서 나에게 “잠깐”이라고 말을 건네시는 것 같은 모습이 되었다. 여기서의 잠깐, 혹은 멈추라는 의미는 ‘하지 말라’의 뜻이며, 이는 곧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시무외)가 된다. 이를 조금 현대적인 의미로 풀자면 “좌절금지” 정도의 뜻일 것 같은데, 최영림의 판화 속 부처는 원래 이 수인이 무슨 의미인지 훨씬 잘 풀어서 보여주는 것 같다. 좌불 역시 손을 들어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해주시는 듯한 느낌이 들어 친근감 마저 느껴진다.

한편 유화로 그려진 그림들 중에서는 ‘불심(佛心)’이란 제목이 붙은 것이 많다. 사슴을 앞에 두고 한 손에는 연꽃을 들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존재는 부처일까? 뒤에는 광배같은 것도 보여서 이를 부처라고도 한다. 사슴을 보니 아마도 녹야원설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아니신 것 같다. 아미타불도, 미륵불도 아니다. 그보다 그림의 제목처럼 우리 마음 속 부처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서는 누구나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불성을 발견하는 것이 부처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늘 불단 위의 부처님만 보면서 부처는 한 모습이라고 믿는다. 그 모습은 내 안에 있는 부처의 모습과는 다른데, 그 모습만 찾으니 내 안의 부처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마치 휴대전화를 빤히 손에 들고서는 휴대전화 찾고 있는 것이 현실의 우리 모습인 셈이다. 그래서 최영림은 우리에게 이러한 ‘불심’을 그려놓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부처 이미 안고 계시잖아요”. 

내가 부처가 된다면 아마 저런 모습이 될 것만 같다. 그림 속 부처는 고독한 혼자인 것 같지만 외로워 보이지 않다. 자기 자신과, 자연과, 동물과 대화하며 스스로 모든 것이 되어버린 존재처럼 느껴진다. 삼존불의 변형이라고도 할 수 있는 1967년작 ‘불심’은 뒤에 광배처럼 붉은 원이 있는데, 한편으로는 마치 눈동자에 비친 영상처럼도 보인다. 부처를 보는 눈일까? 우리가 타인을 부처로 보면 나 스스로도 부처가 된다는 의미일까? 

애로틱함마저도 순진무구함으로 승화시킨 최영림 화백은 불교미술에서의 ‘귀욤’ 양식이 어떠해야하는가를 알려준다. 순진무구란 곧 ‘때 없는 눈(무구)으로 원래 그대로(순진)’를 바라봄으로써 존재하는 모든 것은 각자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주수완 우석대 조교수 indijoo@hanmail.net

[1580호 / 2021년 4월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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