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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대통령이라면

기자명 청화 스님
성종때 역적모의를 한 세력이 있었는데, 의금부에서 사전에 알게 되어 그 공모자 일당을 모두 잡아 구금했다. 이 사실의 전말을 보고받은 성종은 주모자 한사람만 남기고 나머지 공모자들은 다 풀어주도록 명했다. 이유인즉 역적 사건의 규명에는 고문이 따르고 그러다보면 고문에 못이겨 거짓 토설도 나오고 또 모함도 있어서 왕에 대한 원성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세상이 시끄러워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종은 그 주모자를 자신이 거처하는 내전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단 둘이 대좌했다. 이에 이미 기가 죽은 주모자는 성종 앞에서 몸둘 바를 모르고 머리만 조아렸다. 이런 모습을 본 성종은 부드럽고 나직한 목소리로 "그대는 참으로 장부다운 일을 했다. 나도 왕좌를 나 혼자서만 차지하겠다는 협량은 아니다. 그러니 그대의 도량이나 능력이 이 자리에 앉을 만한 인물만 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이 자리를 그대에게 주겠다. 그러면 지금부터 함께 지내면서 그대의 자격을 시험해보겠다"라고 말했다. 그 후부터 성종은 그와 함께 밥도 먹고 잠도 함께 자면서 지냈다. 이렇게 며칠을 함께 한 사이 역적 주모자는 성종의 위엄과 기상에 압도되어, 그저 하는 말마다 "소인을 어서 죽여 주시옵소서" 뿐이었다. 성종은 그에게"내가 그동안 그대를 살펴보니, 아무래도 임금될 만한 자질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런 실력으로 임금자리를 탐했으니 될 리가 있나. 내 이제 그대를 풀어줄 터이니 그대는 세상에 나가서 다시 한번 잘 모의하여 이 자릴 뺏으러 오너라. 그때그대의 힘에 몰리면 나는 물러나겠다" 이런 말을 하고 신하들의 반대가 맹렬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놓아주었다.

당시의 역적모의는 삼족을 멸하는 극형에 해당하는 죄질이었다. 그럼에도 그를 죽이지 않고 관대하게 살려준 것은 성종의 큰 도량도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성종의 정치적 확신감이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적어도 자신이 이룩해놓은 태평성세는 일부세력에 의해 절대로 붕괴되거나 훼손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역적모의의 세력에 대해 일말의 불안이나 과장된 피해망상을 갖지 않을 수 있었다. 따라서 그런 느긋한 마음이었기에, 격(格)높은 여유와 덕 있는 아량으로써 성종은 역적괴수마저도 어린아이처럼 덥석 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국민의 정부가 구정권 시절에 양산한 양심수와 정치수배자들에게 보인 모습은 정권유지에 너무 자신이 없는 느낌이다. 그렇지 않다면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을 그렇게 망설일 이유가 없다. 양심수나 정치수배자들은 죄인이 아니다. 다만 구정권이 심약한 탓으로 그들의 활동에 정치적 기우를 갖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까 부담이 되어 사회와의 격리를 도모한 조치에 피해자가 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현 정부에서는 구정권의 그런 유산을 계승할 가치도 의무도 없다. 오히려 구정권과 다른 개혁정부답게, 과감하고 결단력 있게 잘못된 매듭은 신속히 풀어야 한다. 그런 조처가 없다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새정권 새정부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인가. 50년만의 정권교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를 갈망했던 많은 사람들의 의지적 노력과 희생의 필연적 결과다. 여기에는 운동가들의 역할이 컸다. 끈질긴 운동가들의 활동에 의해 여당만을 선호했던 사람들의 의식에 동요가 일어났고, 또한 야당을 불신했던 세력들의 생각이 변화되어 마침내는 그 오랜 염원이었던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그들이 오늘의양심수며 정치수배자가 아닌가.

정부는 응당 양심수들을 조건없이 사면 복권시키고 수배자들은 수배해제해야 한다. 그리고 수형이나 수배로 말미암아 군복무의 시기를 놓친 사람들에게는 특정한 배려로써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보장해줘야 한다. 그렇게 하는데는 막대한 예산이 드는 것도 아니다. 결단만 내리면 가능한 일이다.

미처 준비도 되지 못한 대통령이 만들어 놓은 죄인을 죄인으로 인정한다면, 준비된 대통령이라고 할 수 없다.
진실로 준비된 대통령이라면 김대중 정부는 준비되지 못한 전 대통령이 유린한사람들의 명예회복은 물론, 나아가서 그들의 저항정신을 미래사회의 보편적 시민정신이 되도록 높이 거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정권교체를 열망했던 사람들의 바람이며, 또한 김대중 정부가 반드시 보여주어야 할 모습이기 때문이다.


청화 스님/중앙종회 수석부의장,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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