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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회 청담 대선사 상

기자명 이학종
  • 교계
  • 입력 2004.08.10 16:00
  • 댓글 0

중생에 出身活路 열어준 '百衲의 雲水'

조계종 기틀 다진 淨化佛事 주도
하룻밤 破戒로 10년을 맨발 참회

“갈증이 심했나 보군. 그러나 마음이 타는 것은 물로 식힐 수는 없는 법.”
뜨거운 여름날, 진주 서장대(書藏臺) 기슭에 앉아 흘러가는 남강을 바라보던 한청년이 목마름을 달래기 위해 호국사에 들러 물 한 바가지를 벌컥벌컥 마시자 이를 지켜보던 한 노승이 중얼거리듯 한 마디 내던졌다.

'타는 마음은 물로 달랠 수 없는 것이라 … .' 전율처럼 다가온 노승의 말에 청년의 등줄기가 시원해짐을 느꼈다.

“ 스님, 그러면 이 마음이 괴로울 때 편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 마음을 이리 내어 보게. 그러면 내가 고쳐 줄테니.”
뒷날 한국 현대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청년 찬호(청담의 속명)와 포명(圃明)노사의 운명적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아마도 포명 노사는 이 청년이 훗날 조계종을 있게 한 동량이 될 것임을 미리 짐작했을 것이리라.

이날 이후 찬호는 출가를 결심했다. 출가를 위해 해인사를 찾았다가 허락을 받지 못한 후 이듬해 다시 백양사를 찾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찬호는 동창이었던 박생강의 도움을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출가를 했다. 일본 병고현(兵庫縣)에 있는 송운사(松雲寺)의 아끼모도 준가(秋元淳稚)의 문하에서 1년여간 행자수업을 마친 후 귀국하여 고성 옥천사에서 입산, 규영(圭榮)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어린 시절 찬호는 진주 남강변의 촉석루 위에 있는 사숙(私塾)에서 한문 공부를했다. 그러나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성적도 썩 신통치가 못했다. 항상 놀림의 대상이 되어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다. 요즈음으로 따지면 '왕따'였던 셈이다. 하루는 한 친구가 때리고 놀리며 참기 어려울 정도로 못살게 구는 일이 있었다. 그날 따라 늘 당해만 왔던 찬호가 불같이 폭발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찬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력을 다해 그 친구를 때리고, 손에 잡히는 것은 무엇이든닥치는대로 부수고 던져댔다. 그날 이후 사숙에 나갈 수가 없었다. 부모 몰래 사숙을 그만두고, 대신 진주 남강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날이 많아졌다. 그때찬호는 인간의 번민과 삶 등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가질 수 있었다.

얼마 후 찬호는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진주제일보통학교에 입학을 했다. 사숙시절과는 달리 모든 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공부는 물론 예능과 체육 등 학교생활에서 늘 1등을 도맡았을 정도였다.

학교생활을 하면서 찬호는 남다른 면이 많았다. 하얀 이밥에 고기반찬으로 도시락을 싸오는 학생과 꽁보리밥에 형편없이 반찬을 싸오는 학생을 보며 '왜 인간은저리도 고르지 못한걸까'를 고민했다. 쌀밥만 먹으면 오래 살지 못하고 병에 걸려죽게된다고 선전을 해 부잣집 아이들과 가난한 집 아이들이 도시락을 바꿔먹도록유도했다. 힘이 센 친구들을 겁없이 놀려주다가 뭇매를 맞고는 '이는 자작자수(自作自受)'라며 오히려 즐거워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말하기를 싫어하고 언제나 혼자서 골똘하기를 즐겨했다. 청담은 훗날 자신의 어린 시절을 '개성이 뚜렷하고 고독을 즐기는 독특한 아이'로 회고하고 있다.

스무살 남짓 됐을 때 찬호는 풋풋한 사랑에 빠졌다. 한 급우의 누이동생과 다정한 사이가 됐던 것이다. 그러나 풋풋한 사랑이 막 익어갈 즈음 돌연 부모님으로부터 “네 나이도 나이이고 …. 이제 장가를 가야겠다. 마침 좋은 규수감도 있으니.”라는 통보를 받았다. 가슴 저리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고통(愛別離苦)을 경험한 찬호. 어차피 맺어진 인연이니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는 결심을 하곤 했지만 어디에서 오는지 모를 회한과 슬픔, 그리고 허전함들은 그의 삶에 대한 상념을 짙게 만들어갔다.

찬호는 뇌리를 짓누르는 번민을 잊고자 진학을 결심했다. 신학문을 배우고자 동경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외아들을 곁에 두려는 부모의 뜻에 따라 진주농업전문학교에 응시를 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 당시 3·1절 기미독립선언 궐기에서앞장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로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뒤늦게합격처리가 되긴 했지만 그는 인생에서 첫 번째로 경쟁에서 밀려나는 아픔을 경험했다. '인생은 괴로운 것인가 보다.', '인생살이는 즐거운 일보다 괴로운 일이 더많은 것같다.', '불교에서 인생은 고해라고 한 말은 맞는 말이야.' 등 찬호의 마음은 자꾸만 생노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리는 길을 떠나야한다는 쪽으로 기울어갔다. 마치 문관이 되고자 진사시험을 쳤다가 낙방한 후 출가를 해 대도를 이룬 임제의 4대 법손 풍혈(風穴)처럼.

귀국 후 옥천사에서 출가를 한 찬호의 법명은 순호(淳浩), 법호는 청담(靑潭)이었다. 은사의 천거로 청담은 서울 안암동 개운사에 주석하던 당대의 석학 한영(漢永) 화상을 찾아가 대교과정을 이수했다. 특히 화엄경을 깊이 연구했다. 이 때 청담은 이미 삼장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정연한 논리로 '논의 제일(論議 第一)'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교학에 정진을 거듭하는 중에도 청담의 마음 한 구석에는 한 가지 꺼림칙한 것이 있었다. 속가의 문제를 말끔히 정리하지 않은 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것. 청담은 진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호적을 정리하여 아내에게 재가(再家)의 기회를 주어 여인으로서 못다한 행복과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바람에 구르는 낙엽처럼 청담은 그렇게 흘러흘러서 진주땅에 발걸음을 들여 놓았다.

그러나 집앞에 도착해 대문 안으로 들어갈 때 머뭇거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내와 눈길이 마주쳤다. 아내는 망부석이 되어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잠시 후 반가움과 원망이 섞인 목소리로 “무엇 때문에 다시 왔소?”라고 삼키듯 한마디를 했을 뿐 다시 침묵은 이어졌다. 얼마가 지났을까. 아내에게 자신의 뜻을 설명한 후 막상 “당신이바라는 일이면 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라는 아내의 승낙을 받아내니, 이번에는 알 수 없는 죄의식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그래, 아내에게 준 고통을 생각해서라도 반드시 부처가 되어야지. 나는 한 순간도 피나는 수도와 정진을 멈추지 않으리라.” 청담은 굳게 다짐을 했다. 호적정리를 끝낸 후 그길로 험난한 구도행각에 들어갔다. 덕숭산과 오대산을 거쳐 당대의 선지식 수월 선사를 친견하기 위해만주로 건너갔다. 움막에서 수월 선사와 몇 개월째 고행정진을 한 청담은 다시 발길을 돌려 설악산을 거쳐 오대산에 이르렀다. 상원사에서 정진을 하던 중 뜻하지않은 초청장을 받았다. 고향인 진주의 불교 신도회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몇번을 망설이다가 청담은 마침내 진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강연은 성황 속에 끝났다.

여기저기서 '청담 스님은 우리 진주의 자랑'이라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혹시 노모가 이곳에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진주땅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막 연화사 일주문을 나서는 순간 펄럭거리는 장삼자락을 움켜잡는 한 노파가 있었으니 ….
“이것봐라. 애비야. 나다 에미다.”
청담은 질끈 눈을 감았다.
“내 아들이 법문을 하러 온다기에 새벽부터 와서 기다렸다. 내가 죽기 전에 네게 꼭 할 말이 있다.”
청담은 노모의 손에 이끌려 속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얘야. 내 마지막 유언이라고 생각하고 들어라. 아다시피 우리 집안엔 아들이 없다. 대가 끊길 것을 생각하니 죽어서 느이 아버지 볼 면목이 없구나. 오늘 밤 가문의 대를 이을 씨 하나만 심어놓고 가거라.”

날벼락 같은 어머니의 요구에 청담은 어쩔 줄 몰랐다. “안됩니다. 그럴 수는없는 일 ….” 수없이 거절을 했지만, 완강히 버티는 어머니의 요구를 뿌리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애끓는 통곡을 듣고 있던 청담은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들이기로 결심을 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그날 밤을 지냈다. 다음날 횃대에서새벽 닭 우는 소리가 들렸을 때 청담은 버선도 신지 않은 채 속가를 빠져 나갔다. 파계(破戒)에 대한 가책으로 그날 이후 10년 간을 맨발로 살았다. 실로 석가의 6년 고행을 방불케 하는 뼈를 깎는 참회행각이었다.

정화불사(淨化佛事)를 빼놓고 청담을 설명할 수는 없는 일. '정화의 화신'으로 불리는 그가 정화운동을 생각한 것은 개운사 강원재학 시절부터이다. 운수행을 하면서 한국불교가 이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틈나는 대로 전국의 사찰을 돌며 동지를 규합했다. 만공 선사의 각별한 지도 아래 대교과를 졸업할 당시에는 50여명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불교가 속화(俗化)할 대로 속화했으니 우리 젊은 승려들이 앞장서서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 불타의 참 진리를 선양하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취처(娶妻)를 정책적으로 장려했던 총독부의 방해로 학인대회는 실패로 돌아갔고, 학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학인대회가 수포로 돌아갔지만 청담의 정화원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해방 후 다시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모았으나 이번에는 6·25 한국전쟁으로 거사를 접어야 했다. 마침내 1954년 동산, 금오, 효봉 등과 함께 정화의 깃발을 들었으니, 정화운동의 뜻을 품은 지 25년만의 거사였다.

“나라는 해방이 되었으나 불교는 아직도 왜색을 벗지 못하고 있다. 우리 정통불교를 되찾아야 한다.” 청담은 정화불사의 총 사령관이었다. 전국을 돌며 비구승을 격려했고, 단식농성과 거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정화가 한창 진행중이던 1955년에는 총무원장을 맡았고, 1966년에는 효봉에 이어 제2대 종정에 취임했다. 정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종권다툼이 벌어지자 1969년에는 종단탈퇴선언을 하는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청담의 주도로 일어난 정화불사로 인해 한국불교는 정통의 맥을 다시 이을 수있었다. 불교현대화, 불교대중화 운동 등 오늘날 한국불교 위상에 큰 영향을 미친것들은 모두 청담에게서 비롯됐다. 종단의 3대 사업인 도제양성, 역경, 포교도 청담이 제시한 것이다.

불교정화를 위해 평생을 바치면서도 틈틈이 서예와 사진찍기를 즐겨했던 청담.야외에서 자리가 마련되면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파안대소를 했던 너무나 인간적이었던 그는 그러나 평생의 서원이었던 정화불사의 완성을 보지 못한 채 고희의나이로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청담이 인연을 다했다는 소식을 들은 석주 스님은 그 안타까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청담 스님은 우리 불자들의 가장 믿을 수 있는 의지처이자, 무명의 고해에서 방향을 잃은 중생들에게 항로를 일러주는 등대불이었습니다. 까닭에 우리는 모두이렇게 아쉽기 한량없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습니다.”


이학종 기자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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