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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조선왕자서 일본의 聖人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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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4.08.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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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취재-409년만에 알려진 일본의 한국인 고승

조선 선조의 맏손자 4세 때 왜군 포로돼

13세에 일본서 출가 성인으로 추앙 받아


조선 14대 왕인 선조의 맏손자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했던 일련종의 고승 일연(日延, 1589∼1665) 스님. 지난 5월초 양은용 원광대 교수가 한국불교학결집대회에서 일연 스님을 간략히 소개함으로써 국내에 처음 알려졌다. 본지에서는 양 교수와의 인터뷰 및 자료 등을 제공받아 비운의 왕자 일연 스님을 상세히 소개한다.(편집자)


일연 스님은 한국역사상 가장 처참한 전란이었던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기 불과 3년 전, 선조의 큰아들로 당시 16세였던 임해군의 첫째 아들로 출생했다. 1592년 4월 왜적의 침략 앞에 조선왕조는 저항 한번 제대로 못했고, 결국 임금조차 도성을 등지고 난을 피해 북으로 향해야 했다. 당시 4살이었던 왕자도 아버지 임해군과 함께 함경도로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해 9월 임해군은 의병을 모집하던 중 회령에서 이민족(鞠景人)에게 붙잡혔고, 두 살 위의 누나와 함께 70여 년간의 긴 억류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이들 가족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져 함경남도 남부에 위치한 고원에 수감됐다가 이듬해 다시 부산으로 이송됐다.

전화의 불길이 한반도 전역을 뒤덮은 가운데 명나라 군대가 파견되고, 의병의 눈부신 활약이 이어지면서 왜군은 경상도 지역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이후 명나라와 왜군사이에 화의가 암암리에 진행되면서 아버지 임해군은 풀려나게 된다. 어린 아들과 딸은 적진에 볼모로 남겨둔 채로….



약관 나이에 수행력 인정



『조선왕조실록』23집에는 임해군을 성격이 난폭하고 여러 차례 왜장 가토에게 서신을 보내 내정을 탐사하려 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심지어는 그의 동생인 정원군을 협박해 군사비밀을 누설하던 첩자를 풀어줄 것을 요청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임해군의 이러한 행동이 가토와의 각별한 친분 때문인 것으로 해석하지만 적진에 두 피붙이를 남겨 둔 나이 어린 아버지의 애달픈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협상은 끝내 결렬되고 1597년 1월 일본이 다시 침략(정유재란)했을 때는 이미 두 아이가 왜장 가토의 본거지인 후쿠오카 지역으로 이송된 뒤였다. 이역만리 낯선 이국에서 이들 오누이는 서로를 의지한 채 “너희를 반드시 데리러 오마”라고 굳게 약속했을 아버지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냈으리라. 그렇게 한해 두해 세월은 가고 왕자가 13세가 되던 해인 1601년. 마침내 그는 법성사(法性寺)에서 삼단 같은 머리를 자르고 왕자로서의 삶이 아닌 출가자로서의 삶을 살기로 서원한다. 어린 나이에 겪었던 삶의 무게와 고통이 그로 하여금 출가자의 길을 걷도록 했던 큰 원인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련종 계통의 절인 이곳에서 ‘대응(大應)’이라는 법명을 받았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법명은 일본어로 ‘대왕(大王)’과 동일한 발음인 ‘다이오’로 불리게 된다.

출가생활이 익숙해질 무렵인 3년 뒤 그는 홀홀단신 수천리의 길을 걸어 당시 일련종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던 교토 본국사(本國寺) 구법단림(求法檀林)에서 3년간 불교교리를 공부한 후 정식 학승(學僧)이 됐다. 이후 인근 지역인 치바(千葉) 반고사(飯高寺) 반고단림(飯高檀林)에서 다시 심도 있는 교육과정을 마친 후 가관원(可觀院)이라는 당호 및 일연상인(日延上人)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다. ‘상인(上人)’은 고등교육 과정을 마치고 타인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승려에게만 부여하는 호칭으로 약관의 나이에 이미 스님은 불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수행능력을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조국으로부터 날아든 비보



이런 가운데 그가 부친 임해군의 부음을 접한 것은 21살 되던 해. 선조의 죽음을 앞두고 벌어진 왕권쟁탈의 소용돌이 속에서 임해군은 진도로 유배됐다가 결국 다음해인 1609년 강화도에서 35세의 나이에 죽임을 당하고 만다. 조국에서 날아온 이러한 비보는 일연 스님으로 하여금 고국으로 돌아갈 한 가닥 희망마저 꺾었을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의 15년 집권과 이후 가속화된 억불숭유정책은 일본의 출가 승려였던 그의 귀환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스님은 고향의 꿈을 접은 대신 포교와 수행에 더욱 몰두했다. 그 결과 26세의 나이에 일연종 창시자인 일련상인(日蓮上人, 1313∼1212)이 태어난 치바의 탄생사(誕生寺) 제18세를 역임하면서 사실상 일연종을 대표하는 인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일연 스님은 일본의 대표적 종파인 일련종을 이끌면서 역점을 두었던 점은 포교와 계율정신의 강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탄생사에 조사당을 건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후쿠오카에 용잠사(龍潛寺)를 건립하면서 불교의 가르침을 대중화하는 동시에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도록 교화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런 가운데 그가 42세가 되던 1631년 2월 일본불교사의 한 획을 그었던 유명한 신지대론(身池對論) 사건이 일어난다. 새로운 막부정권이 들어서면서 불교계와 결탁을 도모하자 불교계는 정권과 타협해야 한다는 수정주의와 이를 거부해야 한다는 원칙주의가 대립한다. 이런 가운데 막부는 1630년 2월 양측의 대표로 하여금 대론을 유도한 후 결국 수정주의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원칙주의를 주장했던 스님들을 수도권에서 축출하게 된다. 일연 스님도 일련종의 대표로서 대론에 참가할 것을 요구받지만 끝내 불참하고, 도쿄에 각림사(覺林寺)와 원진사(圓眞寺) 등 불사와 포교사업에 전념한다. 그러나 다음해인 1631년 원칙주의를 끝내 고수했던 스님은 모든 직책을 접어두고 이세(伊勢)를 거쳐 어린 시절을 보냈던 후쿠오카로 돌아온다.



조선과 가장 가까운 사찰서 입적



그의 귀환을 가장 반겼던 것은 누님이었다. 자의반 타의반 그곳에서 결혼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유일한 피붙이인 동생을 반기며 솜씨 좋은 조각가를 시켜 동생의 모습을 새기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후쿠오카의 번주 쿠로다(黑田忠之)가 스님에게 귀의해 그를 위해 9000평의 절땅을 헌납하고 향정사(香正寺)를 지어 바친다. 그곳에서 20여 년간 수행과 교화에 전념하고 민중들에게는 성인으로 추앙 받는다. 그의 나이 72살 때 “조국 조선 땅이 보이는 땅에 거주하고 싶다”는 뜻을 쿠로다에게 전하자 그는 즉시 해복산(海福山)에 묘안사(妙安寺)를 건립한다. 1665년 1월 26일. 그곳에서 일연 스님은 끝내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77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게 된다.

스님은 『선학원재답(禪學院再答)』과 『정토종무답기록(淨土宗問答記錄)』 등 저술을 남겼다고 전하나 현재 그 소재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지를 답사한 양은용 교수에 따르면 치바 탄생사에는 그가 그린 본존 만다라가 전하며, 도쿄 각림사에는 스님이 꽃을 좋아하고 잘 가꾸어 국가에서 화전(花田)으로 하사한 땅에 세운 절이라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후쿠오카의 번주 쿠로다가 바둑 애호가인 스님을 만나기 위해 만든 상인교(上人橋)가 4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재하다. 특히 묘안사를 비롯한 그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에서는 아직도 스님을 ‘고려일연상인(高麗日延上人)’으로, 또 절망을 딛고 당당히 자신의 삶을 개척했던 위대한 성인으로 기억하고 있다.



“고통 딛고 진리 완성한 참 수행자”

일연스님 조명 원광대 양은용 교수



“일연 스님은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삶을 보여준 인물입니다.”

한국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일연 스님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양은용 교수는 “스님의 삶은 작은 절망에도 쉽게 흔들리고 괴로워하는 현대인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고 밝히고, “그 분은 용서란 상대방이 반드시 참회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픔을 겪은 측이 할 수 있는 위대한 행위임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월 일연 스님이 행적을 찾아 후쿠오카와 교토, 치바, 도쿄 등을 직접 답사하기도 했던 양 교수는 스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논문을 준비하는 동시에 앞으로 스님의 행적과 사상을 기리는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올 하반기에는 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경복궁을 비롯해 선조와 임해군의 능 등 일연 스님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도 참배할 예정이다. 특히 불에 타 목만 남은 스님의 두상에 적합한 몸을 한국에서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오는 8월 18일 일연 스님이 입적했던 묘안사에서 초청강연회를 요청 받기도 한 그는 “스님이 지향했던 세계는 국가를 넘어선 불국토의 세계”라며 “스님의 삶과 발자취가 한일간의 원한과 증오가 해소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일연 스님 행장



1589(1세) 조선왕실에서 임해군 아들로 출생

1592(4세) 4월. 임진왜란 발발, 함경도로 떠남.

1592(4세) 9월. 회령에서 붙잡혀 가또에게 넘겨져 일본으로 이송.

1593(5세) 7월. 부친 임해군 귀환.

1601(13세) 후쿠오카 법성사에서 출가.

1604(16세) 교토 본국사 구법단림 수학.

1607(19세) 치바 반고단림에서 수학.(가관원, 일연상인 호를 받음)

1608(20세) 광해군 지지세력 주청으로 부친 임해군 진도로 유배.

1609(21세) 임해군 살해당함.

1614(26세) 치바 탄생사 18세 계승, 조사당 건립. 후쿠오카 용잠사 건립.

1630(42세) 신지대론에 불참.

1631(43세) 동경 각림사·원진사 건립. 신지대론 문제로 추방된 후 후쿠오카로 귀환.

1632(44세) 번주 쿠로다 귀의로 법성사 창건.

1660(72세) 쿠로다의 후원으로 묘안사 창건.

1665(77세) 1월 26일. 묘안사에서 입적.



이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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