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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축특집 - 티베트불교에서 한국불교가 배울점

  • 교계
  • 입력 2004.08.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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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움직이는 티베트 불교의 저력" (4)

“교학-계율 속 정체성 확보”

최상승법보다는 점진적 수행법 강조


필자는 티베트 불교 전공자가 아니다. 티베트는 물론이고 티베트의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의 달람살라에조차 가 본 일이 없다. 그런데 티베트 불교인들의 신행 지침서인 『보리도차제론』 이라는 책을 접한 이후 필자는 티베트 불교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구의 불교학자들에 의해 정립된 ‘인문학적 불교학’의 길에 들어서서 그 한계를 절감하고 ‘신앙으로서의 불교학’을 암중모색(暗中摸索)하던 필자에게 『보리도차제론』 에서 말하는 신행 체계는 한 줄기 광명과 같았다. 지금부터 600여년 전 티베트불교의 대 학장(學匠) 쫑카빠(Tsonkhapa) 스님에 의해 저술된 『보리도차제론』에서는 그 제목에서 보듯이 깨달음(菩提)에 이르는 길(道)에 순서(次第)를 매기고 있다. 즉, 불교 신행과 수행은 세 단계(= 三士道)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선행-참회 생활 몸에 배어



삼보에 귀의한 모든 불교인들은 먼저 항상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탐욕을 제거하며, 선업을 쌓고 참회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는 윤회의 세계 내에서의 향상을 추구하는 삶으로 하사도(下士道)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 자세가 철저하게 몸에 밴 자에 한해 해탈과 열반을 지향하는 소승적 수행, 즉 중사도(中士道)가 허용된다.

하사도의 신행을 통해 도덕적 심성이 계발되지 않은 사람이 깨달음을 위해 중사도의 수행을 하는 것은 마치 모래를 삶아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아 헛수고일 뿐이며 자칫하면 깨달음과 거리가 먼 교만심만 키울 수 있다.

중사도는 윤회의 세계에서의 탈출, 소위 소승적 깨달음을 추구하는 삶이다. 그리고 중사도의 수행이 무르익은 사람들에 한해 상사도인 보살의 삶이 허용된다. 중사도적 수행의 구극(究極)에 이를 때, 수많은 중생을 위해 자비심을 발하여 깨달음을 유예하고 다시 윤회의 세계 내에서 보살과 같이 살아가는 것이 상사도의 삶이다. 그리고 최고의 경지인 즉신성불(卽身成佛)을 체득하는 밀교적 행법은 삼사도(三士道)의 신행 이후에 비로소 허용된다. 티베트 불교의 이러한 점진적 수행관과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의 많은 불교인들은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하는 최상승법만을 선호해 온 듯 하다. 『보리도차제론』 의 신행 체계에 비추어 볼 때, 최상승법의 수행을 통해 체득되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의 경지는 삼사도의 신행이 무르익은 이후에야 가능한 즉신성불(卽身成佛)의 경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성불은 신행 무르익은 뒤에야



그런데 우리 불교계에서는, 갓 입문한 수행자는 물론이고, 전문적인 수행이 불가능한 재가불자들에게까지 최상승법의 수행을 권유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최상승법의 수행 이전에, 『보리도차제론』에서 제시하는 신행 단계 중, ‘삼보에 귀의한 후,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念死), 선업을 지으며, 참회하고 사는’ 하사도의 신행이 승속을 포괄하여 우리나라 모든 불자들의 기본적 신행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티베트 불교가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교훈은 수행 못지 않게 교학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우리 불교계에서는 불립문자를 표방하는 선불교를 지향해 왔기에, 문자와 씨름하는 교학 공부가 참선 수행에 비해 가치가 낮은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물론 불교 수행에 있어서 참선을 통해 자신의 마음 광명을 직접 확인하는 것 이상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확철대오한 스승의 지도가 필수적이다. 주지하듯이 선은 사자상승(師資相承)의 전통 하에서만 불교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 불교에서도 스승의 역할을 중시하지만 교학이 이를 대신할 수 있다고 본다. 부처님의 은혜는 법은(法恩), 즉 그 가르침의 은혜이다. 수행자를 이끌어 줄 진정한 스승이 있을 경우,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교학이 필수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교학 연구 10년 이상 필수



그러나 그런 스승과 인연이 닿지 않은 사람에게 교학은 깨달음의 길을 안내하는 정확한 지도가 된다. 티베트의 스님들은 기본적으로 총 10년 이상을 교학 공부에 매진한다. 이런 공부를 통해 깨달음의 여행을 위한 정확한 지도가 준비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티베트 불교에서 배울 점은 계율과 의식(儀式)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실천이다. 쫑카빠의 『보리도차제론』은 지금부터 약 1000년 전 인도에서 초청된 아띠샤(Ati쳒a) 스님의 가르침을 토대로 삼아 저술된 것이다. 계율에 대한 경시와, 무분별한 밀교 행법으로 인한 폐해가 극에 달해 심각한 타락상을 보이던 그 당시 티베트 불교계는 지계행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단계적 수행법을 가르친 아띠샤 스님의 등장과 함께 정화된다. 계율과 의식은 한 마디로 ‘규범’이라고 부를 수 있다.

어떤 집단이든 규범은 개개의 구성원을 맺어주는 끈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규범이 잘 지켜지는 집단일수록 강한 집단이라고 평가된다.



의식-규범이 결속력 원인



한 집단의 아이덴티티(identity)를 결정하는 사회적인 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규칙과 의례 등과 같이 그 집단에서 제정한 규범이다. 인도에서 자이나교(Jaina敎)가 2500년 이상 생명력을 갖고 존속해 오고 있으며, 유태인 집단이 2000년에 걸친 유랑생활 속에서도 와해되지 않고 살아 남았으며, 이슬람교가 전 세계적으로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공통적인 이유는, 그 가르침의 고매함 때문이기보다 계율이나 의식 등 규범에 대한 믿음과 실천력 때문이다.

티베트의 불교인들 역시 계율과 의식(儀式)이라는 불교적 규범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갖고 이를 실천하며 살고 있기에, 그런 규범의 그릇에 담겨진 부처님의 가르침이 진한 향기를 뿜어내며 온 인류를 감동시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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