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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의 차이야기(40) - 조롱박과 히샤쿠

  • 교계
  • 입력 2004.08.10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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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욕은 질박하고 선이 고운 조롱박으로


태고의 적요를 휘감는 목어소리와 칠흑의 어둠 속, 천년 노송이 뿜어내는 솔향 가득한 오솔길을, 손에 꽃 등을 들고 걷는 정취를 무엇과 견줄 수 있을까.

지난해, 초파일에는 파주의 한 산사를 찾았다. 절 입구에 들어서니 상춘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에 묻혀 독경소리가 어슴프레 들렸다. 그곳이 산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묵연히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였다.

일주문에 이르니, 예불시간이 한참을 지났는데도 현란한 한복차림의 불자들이 ‘부처님 오신날’ 리본을 달아 주느라 분주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초파일이면 어느 절에서나 쉽게 눈에 띄는 풍물패 소리가 산사를 뒤덮고 있었다.

붉은 휘장을 하늘에 친 듯, 하늘을 빼곡히 덮은 연등터널을 지나 대웅전 앞에 길게 늘어선 관욕대 줄 쪽으로 갔다. 차례를 기다리며 애기 부처님 관욕시키는 것을 바라보다 물을 뜨는 도구에 시선이 멎었다. 그것은 일본 다도에서 행다를 할 때 사용하는 차도구 히샤쿠(柄勺)를 모방하여 만든 물뜨개였다.

히샤쿠는 일보다도에서 말차(抹茶)를 점다하기 위해 솥에서 물을 뜰 때 사용하는 것으로, 원통의 큰 대나무를 잘라 물을 뜨는 부분을 만들고, 손잡이 부분은 대나무를 길고 가늘게 쪼개 다듬어 끼워서 매끈하게 만든 물뜨개이다. 대부분의 일본문화가 그렇듯 깔끔하고 정갈한 형태의 차도구이다.

그것을 모방하여 만든 관욕용 물뜨개는 일본 것처럼 정교하지도, 그렇다고 우리의 조롱박처럼 소박하지도 않은, 대나무로 만든 어설픈 물뜨개였다.

우리 차례가 되어 그것으로 물을 떠서 애기 부처님을 관욕시키는데, 손에 와 닿는 느낌도 자연스럽지 않았고, 형태는 낯설기만 했다. 관욕을 마치고 대웅전으로 가면서도 자꾸만 시선은 관욕대 쪽으로 갔다.

대웅전에 올라가 예를 드리고 절을 한 바퀴 돌아 일주문을 나서면서도 발걸음은 무겁고 가슴 한 켠이 설핏했다. 정감 있는 우리의 조롱박은 어디로 가고, 일본식 물뜨개로 한국 차문화의 산실인 사원에서 부처님 관욕을 시키고 있을까.

며칠 후, 그 절의 종무소 실장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일본식인 줄 몰랐다며 불교용품점에 그것만 가득하더란다. 박공예 재료를 파는 곳에 가면 조롱박을 살 수 있다고 했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듣던 그 절 직원인 듯한 사람이, 조롱박은 곰팡이가 나서 좋지 않다고 거든다. 사용하고 잘 말려 두면 10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고 했더니 아무 말이 없다.

초파일 며칠 전, 조계사 앞을 지날 때 불교용품 상점마다 수북수북 쌓여 있던 일본식 기물이 부처님 관욕용이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조롱박은 선이 아름답고 질박하며 토속적이다. 자연이 에워싼 사찰의 정취와 애기 부처님을 관욕시키는 불자들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직선의 대나무를 잘라 어설프게 만든 일본식 물뜨개는 경직되고 건조하며 작위적이다. 우리 문화와는 이질적이다.

일본에서 다도는 전국민이 향유하는 문화이며, 일본의 정신과 정서의 원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만큼 다구(茶具)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고 예술성 또한 매우 높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 사람과 일본문화에 어울릴 뿐이다.

며칠 전, 조계사 앞에 가보았다. 올해도 여전히 일본식 물뜨개가 쌓여 있었다. ‘올 초파일에도 전국 사찰에 저 물뜨개가 곳곳에 뿌려지겠구나’ 생각하니 돌아올 때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한 블록 건너 인사동 큰길가에서 팔고 있는 조롱박을 왜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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