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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거사님의 노여움

기자명 혜민 스님
구름 뒤 빛나는 달빛 보는 지혜

진정한 德은 저절로 우러나는 것


벌써 가을의 끝자락이다. 단풍으로 물든 나뭇잎은 지나가는 바람에도 온 몸을 파르르 떨며 대지 위를 뒤덮고 밤하늘엔 앙상해져 버린 나뭇가지 위로 11월의 달이 걸쳐 앉아 있다.

저녁 공양을 하고 나서 그냥 걷고 싶다는 생각에 절 문을 나서 본다. 달빛 아래서 혼자 걷고 있으니 문득 어린 시절 할아버지 자전거 뒷자리에서 보았던 달이 생각이 났다. 나는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자전거를 운전하고 계시는 할아버지를 향해 “할아버지, 달이 계속 나를 따라 와요”라며 큰 소리 외쳤었다. 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는 할아버지, 훌쩍 커버린 나, 그리고 달라진 인연들. 가슴 속에는 어느덧 작은 슬픔들이 알알이 밀려온다.

며칠 전 일이다. 사찰 신도들과 함께 뉴욕의 어느 행사에 다녀왔다. 절에서부터 행사장까지는 차로 40여분 떨어져 있는 곳이었는데, 차를 운전하다 보니 신도들끼리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됐다. 절에 나온 지 며칠 되지 않는 거사님과 신행 생활을 오랫동안 하신 보살님과의 대화였는데 불교 사상과 사찰 행사로 시작된 이야기는 으레 그렇듯 사업과 자녀들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말은 사찰에 나오신 지 얼마 안 되신 거사님이 주로 했는데 현재 맨하턴에서 하는 여러 사업들을 성공적으로 운영해 가고 있고 자녀들도 잘 자라 지금은 다들 유명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자랑이었다. 이에 대해 보살님은 그 거사님의 이야기를 고개를 끄덕여 가며 그냥 묵묵히 잘 듣고만 있을 뿐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행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공양 시간이 되어 신도들과 함께 식당에 들렀다. 그런데 음식이 나오자마자 자랑을 늘어놓았던 그 거사님이 스님과 다른 신도들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웨이터를 향해 벌컥 화를 냈다. 국을 오래전에 떠 놓았는지 따뜻하지 않고 차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때 거사님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던 그 보살님께서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절 신도님들과 같이 오셨을 때는 음식이 입에 안 맞으셔도 불만을 크게 말하게 마세요. 이 식당 안에서는 우리들이 저희 사찰의 얼굴입니다.”

이제야 밝히는 바지만 사실 그 보살님은 사업과 자식 자랑을 하던 거사님보다 세속적으로는 더욱 크게 성공한 분이다. 따라서 나중에 그 거사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쑥스러울까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진정한 덕(德)은 일부러 내 보이지 않아도 우러나오는 법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수양에서 더 고양된다. 구름이 달빛을 가려도 달은 그 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 구름에 대해 싸움을 걸지 않는다. 달의 빛은 구름이 가리든 가리지 않던 본래 그대로이고, 구름이 지나가면 다시 세상을 향해 빛을 발하게 마련이다.

모든 사람이 구름만 보지 않고 구름 뒤에 있는 달빛까지 볼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길 조용한 기원해 본다.


혜민 스님 vocalizethis@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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