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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없으면 법계도 중생도 없다”

기자명 주영미
대전 국은사 벽수선원장 묘 봉 스님

심우회(尋牛會) 열린 법회 ‘화두와 인생’에서


화두 공부를 어렵게만 생각하시는 분이 많습니다만 내 안에 숨어있는 어리석음을 뿌리 채 뽑아버린다는 마음으로 오늘 이야기를 풀어갑시다.

<사진설명>묘봉 스님은 화두를 주제로 법문하며 "인생은 그 자체가 의문 투성이"라고 지적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요? 살아가는데 무엇이 제일 중요합니까? 잘 살게 해달라고요?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요? 행복, 건강? 그것보다 먼저인 건 없습니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하려고 사는 걸까요?

자신을 버리고 살면 된다구요? 그런데 자기를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도 생각할 수 없거든요. 문제는 나라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은 이기심을 버리라는 말이지 나를 어떻게 버립니까. 그리고 나를 위하는 마음이 없으면 남을 위할 생각도 못해요. 그래서 부처님 법문에 ‘자리이타’라는 말이 있죠. “나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남을 위할 줄 안다”고 이야기를 한 것이지 나를 위하는 것도 아니고, 남을 위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나를 버리겠다는 겁니까. 그러니까 “나를 버린다”고 하는 말도 이것은 방편으로 하신 말씀이지 인생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이 주신 해답은 뭡니까? 감사? 신심? 수행? 그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지 인생에 대한 해답이 안돼요.


나를 버리는 것도 방편일 뿐

끊임없이 질문하는 사람 돼야


사람은 배고프면 일어나서 밥 먹을 줄 알고 이렇게 하면 좋겠다 하는 지혜를 낼 줄 압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불성’이라고 그랬거든요. 오늘 ‘인생과 화두’ 문제를 이야기를 한다는데 내가 거기를 가봐야겠다고 생각을 내는 이 지혜가 어떻게 나왔냐는 말이에요. 지혜를 찾을 줄도 알고, 부처님 믿어야겠다는 생각도 하는 이런 놈이 도대체 뭐냐는 겁니다.

인생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이야기하는 거 보면 알겠는데 딱 꼬집어서 이야기하면 모르죠. 희랍 사람들은 그것을 ‘아포리아’ 라고 불렀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문제점을 찾아라” 이런 얘깁니다. 원래 비구라는 말도 물을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처님이 제자에게 “착한 지주들이여”라고 부르시다가 한 제자가 질문을 하자 “잘 물었다. 비구야”라고 답을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묻지 않고 있는 겁니다. 해답은 어느 곳에도 없어요. 왜? 내 자신이기 때문에, 내 문제기 때문에 내가 찾아야 되는 겁니다. 해답을 찾으려 하지 않으면 그건 죽은 인생이라는 말이에요. ‘어리석지만 물을 줄 아는 사람’이 답을 찾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무엇이냐고요? 묻는 게 인생입니다. 물을 줄 아는 것이 ‘인생’이에요. 그래서 공부하라는 것이지 딴 게 아닙니다. ‘내가 가진 문제는 내가 풀어야 한다’ 이것이 화두입니다.

그래서 나는 무엇인가, 인생이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올바른 인생인가 끊임없이 생각을 해야 하기 때문에 화두 공부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으로 한번 살아보는 것이 진짜 나라는 거예요.

인생이 곧 화두다. 물음 자체가 중생이요, 물음 자체가 법계요, 물음 자체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지 이 몸뚱어리가 어떻게 생각을 나오게 할 것입니까? 답이 있는 것은 물음이 아니 아니요. 대답이 있는 물음은 이미 죽은 것이고, 지혜라고 하는 것은 항상 경계에 받쳐 일어나는 생각일 뿐입니다. 인간은 자꾸 생각을 하면서 생각에 의해서 생각을 규정짓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말씀에 생각을 한 것은 생각으로 그쳐야지 그것에 이름을 붙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일 중요한 주제는 '인생은 그 자체가 의문 투성이'라는 겁니다. 왜 의문이냐 하면 답변이 나오자마자 스스로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답변을 곧잘 내는데 그 답변이 답으로 주어지자마자 부서지는 걸 경험합니다. 마치 밥을 씹으면 변화하는 것과 같죠. 먹을 때에는 그것을 허겁지겁 넣지 못해 야단인데 내보낼 때는 꼴도 보기 싫은 똥 이예요.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지혜라고 하는 것, 지식이라고 하는 것도 먹을 때에는 신바람이 나는데 나갈 적에는 냄새가 독해. 그렇기 때문에 빨리 버릴 줄 알면 새 밥을 먹게 됩니다.

그러니까 항상 많이, 잘 버릴수록 지혜가 싱싱해진다고 해서 “자기를 버리라”고 하는 겁니다. 자기를 버리라고 해서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고 버릴수록 얻어지기 때문이고 그것이 진정한 보시입니다. 지혜를 가지라 하는 것은 없는 지혜를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가장 잘 묻는 것에 따라서 가장 좋은 지혜를 회향하고 간다” 이 말이죠.

왜냐하면 답변은 바로 우리 자신이니까요. 인간 자체가 답변이에요. 이 존재 자체가. 문제는 거기다가 얼마나 잘 묻느냐에 따라서 내가 얼마만큼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느냐가 정해져 있어요. 뭘 물었을 때에 내가 더 싱싱해지고 더 지혜로워 지겠습니까?

묻지 않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는 거예요. 한 가지 지혜는 갖고 있겠죠. 본능의 지혜만 갖고 살다 죽는 거예요. 그러나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본능까지도 이긴답니다. 어떤 사람은 제 목숨까지 법을 위해서 버립니다. 그런 사람이 부처님이 되는 거죠. 올바른 의문만 가지면 인생이 활짝 필 수 있어요.


부산지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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