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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특집-2004 한국불교의 과제-“불교학, 새 것만 탐하다 뿌리 잃는다”

기자명 법보신문

뉴욕주립대 박 성 배 교수

수행자-학자 구분하는

잘못된 풍토 사라져야


뉴욕에서 장사하는 친구의 말이 생각난다. 어디에나 있는 물건을 갖다 놓고서는 장사가 안 된단다. 아무 데도 없는 귀한 물건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거기에만 있다는 소문이 나야한다는 것이다. 비즈니스의 사활은 경쟁력의 유무에 있다고 한다. 지구촌 시대에 살면서 다른 나라의 불교학과 경쟁하는 마당에 한국의 불교학이 가진 경쟁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70년대 초에 내가 버클리 대학에서 공부할 때 지도교수였던 랑케스터 박사가 아시아 불교국가들을 순방하고 돌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 “한국 불교에는 어떤 고유한 특색이 있는 것 같다. 사원에서 스님들이 목숨을 걸고 용맹정진하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태국 같은 남방의 불교나 이웃인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다.” ‘스님들이 용맹정진하는 불교’, 이것은 분명히 한국 불교의 두드러진 특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불교학엔 이런 특색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어찌된 일일까.

한국에는 스님과 학자를 둘로 나누는 오랜 전통이 있다. 지금 스님들이 사는 수도원과 학자들이 활동하는 대학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양자는 정말 얼음과 숯불의 관계처럼 그렇게 먼 것일까?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솔직히 말해보자. 양자를 엄격하게 구별하는 지금의 수도원은 잘 되고 있는가? 그리고 또 그러한 불교 대학은 어떤가? 옛날엔 양자를 갈라놓았기 때문에 양자가 다 잘 되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옛날 이야기다. 오늘날은 다르다. 지금은 그 벽을 깨야 할 때다. 다시 말하면, 스님이면서 학자고, 학자면서 스님이고, 더 나아가서는 수도원이면서 대학이고, 대학이면서 수도원이고 그런 식으로 말이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많을 것이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러다가 스님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며, 수도원도 아니고 대학도 아니게 되어 버리면 어쩌지 하는 것이리라.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글까.

왜 스님들만 용맹정진을 하는가. 학자들도 용맹정진하자. 이것은 나의 오랜 주장이었다. 그래서 1997년 여름, 미국의 뉴햄프셔 주에 있는 어느 써머 하우스에서 체용(?用)학회의 워크숍을 할 때, 나는 용맹정진과 학문활동의 접목을 시도해 보았다. 그 결과는 의외에도 좋았다. 묵언과 토론을 겸하고, 참선과 강의를 겸하고, 기독교와 유교와 불교를 겸하고, 충분한 수면과 휴식과 운동과 음식 등등을 모두 겸했으니 겉보기에 스님들의 용맹정진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러나 시종일관 긴장감이 감돌고 끝없이 절차탁마하는 분위기는 ‘용맹정진’ 그대로였다. 일주일간의 워크숍이 끝난 뒤 참가한 사람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환골탈태한 기분이라고 말하는 회원도 있었다.


학자들도 수행해야

불교학의 발전 있어

우리의 불교학이 겉보기에 아무리 화려해 보인다 하더라도 그것이 만일 우리 중생들의 절실한 삶과 동떨어져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무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한국 불교학의 근본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50년대에 한국 철학을 일으켜 보려고 애썼던 박종홍 교수는 그 당시 유행했던 실존주의 철학이나 과학철학에 미친 학생들을 조용히 나무랐다. “학생들은 지금 자기가 가장 새로운 것을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겠지만 얼마 안 가서 자기는 밤낮 남들의 뒤꽁무니만 붙들고 따라 다니기에 바빴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선생님의 말씀은 옳았다. 오늘날 불교학을 한다면서 너무 새것만을 탐내는 풍조가 좀 심한 것 같아서 걱정스럽다. 원전 연구가 중요하다니까 우르르 그 쪽으로 몰리고, 문헌 비판과 역사 고증이 중요하다니까 너도나도 거기에 머리를 싸매고, 자연환경과 생명이 문제라니까 불교생태학에 박이 터지고, 경제, 정치, 사회, 과학, 유전공학 등등 인기 있는 곳이면 거기에 불교자만 붙여서 불교경제학, 불교사회학 등등 새로운 전공이 자꾸만 생겨나고 있다.

새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어쩌면 그것은 살아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환영해야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부화뇌동 현상이 안타깝단 말이다. 한국의 장래를 짊어질 불교학의 대들보들이 세상 물결 흘러가는 대로 휩쓸려 다니는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선지식이 안 계시고 지도자가 없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누가 선지식이고 누가 지도자인가? 오늘날은 영웅주의 시대가 아니다. 어느 개인이 그 중요한 몫을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다. 집단적인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 거종단(擧宗團)적인 종합진단 평가서는 지금까지의 한국불교학을 청산하는 백서가 될 수 있으며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가야할 길을 가리키는 선지식 노릇도 해줄 것이다.

지금 서양의 불교학은 문헌 중심의 학문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철학적 탐구는 가뭄에 콩나기요, 믿음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가 무엇이 진정한 깨침인가를 따지는 연구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철학의 빈곤은 전 세계적인 현상인가. 철학이란 돈 잘 벌고 출세하기 위해 하는 일이 아니다. ‘철학한다’는 말은 남의 뒤를 맹목적으로 따라다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금 자기가 가고있는 길에도 끊임없이 회의의 칼날을 꽂는 피나는 작업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고로 독재자들은 철학을 싫어했다. 요즘도 기득권을 뺏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금권지향적 인사들도 철학을 싫어한다. 이러한 폐단을 못 본척하고 그 밑에서 떡고물이나 얻어먹으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불교학은 그 겉모습이 아무리 훌륭해 보여도 진정한 의미의 불교학이 될 수는 없다. 천하가 다 북으로 달려가는데도 홀로 남쪽을 향해 버티고 앉아서 용맹정진하는 스님 정신이 새삼스럽게 아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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