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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움과 비움의 지혜

기자명 이언오
  • 기고
  • 입력 2004.03.22 13:00
  • 댓글 0
'2% 부족할 때'라는 음료가 있다.무언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아서인지히트상품이 되었다. 과천의 한 교회는 슬로건이 '뜨겁고 가득 차 넘치자'이다. 주위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지나친 열기에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세상은 이처럼 채워야 하며 넘쳐나야 한다고 끊임없이 압박을 한다. 채우기 경쟁에서 뒤쳐지면 큰 일 이 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채움에 대한 의지는 개인 삶과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다. 살아가는 과정 하나 하나는 채움의 연속이다. 폐에 공기를 채우지 않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듯이. 하지만 제대로 비우지 않으면 심각한 폐해가 나타난다. 숨을 내쉬지 않으면 죽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환경파괴, 부동산투기, 사교육열풍, 빈부격차 등은 물질과 욕망을 채우려고만 해서 초래된 병리현상들이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에 계영배가 등장한다. 가득 채우면 내용물이 사라지는 잔으로 넘침, 자만, 과욕을 경계하기 위한 상징물이다. 과도하면 부작용이 따르는 것이 세상의 섭리이다. 경기나 주가가 비정상적으로 호조를 보이면 이어지는 골짜기가 가파르다. 분에 넘치는 돈, 권력, 명예를 탐했던 인사들은 예외 없이 불명예 퇴진을 했다. 적당히 비우는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비어 있음은 진리이자 행복의 조건이다. 우리의 몸, 소유물, 추구 대상들은 원래부터 실체가 없으며 항상 변한다. 생로병사, 사계절 순환도 채워진 것은 언젠가는 비워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비우지 않으려는 것은 헛된 집착일 뿐이다. 비워져 있음을 긍정하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절반쯤 물이 차 있는 컵을 보고 어떤 사람은 '반이 비어있다' 하고 다른 사람은 '반이나 남아있다'고 말한다. 후자의 관점은 사업에 망한 기업가로 하여금 '실패 경험을 했다', '돈은 잃었지만 진정한 친구를 얻었다'고 말하게 한다.

채워진 것을 적극적으로 비우는 노력이 요구된다. 어느 서양인 학자가 선사에게 가르침을 구하자 선사는 말없이 차를 따라 주었다. 잔이 넘쳐도 멈추지 않았고 황당해 하는 서양인 학자에게 '비우지 않으면 진리가 자리잡을 수 없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우리네 머리 속은 쓸모 없는 알음알이들로, 일상은 잡동사니 물건들로 넘쳐난다. 마음의 망상을 걷어내야 진정한 자아에 이를 수 있다. 가진 것들을 버리고 소비를 절제하면 그 순간 소박한 삶이 주는 충만함이 찾아든다.

나눔은 자신을 넘어서 비움을 실천하는 행위이다. 진리는 우주에 충만하여 나누어도 비워지지 않는다. 깨달은 이는 원래 비어 있는 자리에서 진리를 나눈다.은 학자들이 얄팍한 지식을 움켜잡고 돈과 명예로 환산할 따름이다. 물질은 우리에게 인연을 따라 일시 주어진 것이다. 남과 물질을 나누는 것은 자연스럽고 진리에 부합하는 일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를 해야 정신적 깨달음과 물질적 복덕이 되돌아온다. 비우려고 보시를하면 다시 채워지니 정말 오묘한 이치이다.

차 있을수록 마음을 비우고 또한 비움을 준비해야 한다. 가득 차면 오만해지고 사고가 나기 쉽다. 한 젊은이가 높은 나무에 올라가는 동안에 마을사람들이 하나 같이 조심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그가 내려오기 시작하자 조용하게 있던 노인이 '조심하게'라고 말했다. 정상에서 내려올 때가 더 위험한 법이다. 많은 정치인과 기업인이 정상에서 오만하고 노욕을 부리다가 불명예 퇴진을 당했다. 지혜로운 이들은 평소에 겸손하고 후계자를 키우며 용퇴한 후에는 귀감이 된다.

그런데 비움을 잘못 이해하고 실천하다 보면 허무에 빠지기 쉽다. 불교계가 세속과 괴리되고 무기력해진 것은 이 때문이다. 색즉시공과 공즉시색을 하나로 보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극복방안이다. 비우되 아집까지 버려야 제대로 비워진다. 깨달음을 향한 수행은 망상을 비우는 대신 자비심으로 채우는 과정이다. 채우는 것을 긍정적 적극적으로 바라보자. 계영배의 용량을 키워서 계속 차 있게 하자. 불교계는 지금 이 자리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더 큰 서원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그 출발점에 다시 서야겠다.


이언오/삼성경제연구소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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