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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시안 대자은사와 현장법사

기자명 이재형

25000㎞ 구법, 중국불교 꽃피운 ‘釋門의 천리마’

<사진설명>2000년 중국부교의 최고봉 현장 법사. 그는 이 곳 자은사를 지을 때 인부들과 함께 벽돌을 나르기도 했다. 사진은 대안탑 7층에서 내려다 본 자은사 전경.

“길을 가기 수만리,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혹한과 얼음으로 뒤덮힌 산길, 파도 높은 격랑의 골짜기, 여독흑풍의 매서움, 야수와 맹수들의 무리를 현장법사는 홀로 갔다. 쌓인 눈이 새벽에 날려 땅을 덮어 길을 잃고, 바람에 날리는 모래 저녁에 일어나 공중 밖 하늘에서 헤매었다. 만리산천의 구름과 안개를 헤치며 그림자를 내몰아 수없이 거듭되는 추위와 더위와 서리와 이슬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으리라. 심오한 법을 구하여 통달하기를 바라며 인도를 두루 유학하기 17년, 온 나라를 다 편력하며 바른 가르침을 구하였어라.”-『대자은사삼장법사전』 中


2200년전 살았던 잔혹한 사내, 진시황을 뒤로 한 채 우리 일행은 대자은사(大慈恩寺)로 향했다. 며칠 째 쏟아 붓던 비가 그치는가 싶더니 다시 가늘게 흩뿌리고 있다. 아침나절 그토록 혼잡했던 도로는 그나마 점심때가 지나면서 다소 한산한 모습이다. 30~40분 정도 지났을까. 멀리 자은사의 대안탑(大雁塔)이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648년 당 고종이 세운 자은사는 『서유기』의 주인공 현장(玄裝, 602~664) 법사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사찰 입구에 들어서자 오른 손에 육환장을 단단히 움켜진 현장법사의 동상이 우뚝 서있다. 다부진 어깨에 굳게 다문 입술, 앞을 응시하고 있는 깊고 그윽한 눈길은 그 옛날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걸었던 위대한 고승의 숨결이 느껴지는 듯 하다.

<사진설명>육환장을 든 현장법사 동상.


17년간 서역 곳곳 순례…명성 떨쳐

현장법사는 17년간 무려 2만5000km에 이르는 구법여행과 이후 20년간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75부 1335권이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경전을 번역했다. 이러한 현장법사의 역경불사에 힘입어 불교는 비로소 동아시아에 깊이 뿌리 내리고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그가 쓴 『대당서역기』는 130여 개국의 지리, 역사, 문화, 종교, 풍속, 정치, 경제 등을 기록한 것으로, 실크로드의 핵심적인 연구 자료이자 오늘날까지 실크로드를 탐사하는데 중요한 지침서가 되고 있다.

현장…, 2000년 중국불교사에서 이토록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 또 있을까.

602년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서 태어난 그는 둘째형 장첩 스님의 영향으로 13세의 나이에 승가고시에 합격해 불문에 귀의했다. 그때 이미 “출가란 무위법(無爲法)이다. 애들 장난만 하고 있다가는 백년을 허송세월하기 십상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하듯, 스님은 출가 후 마른 논이 물을 빨아들이듯 수많은 경전을 배워나갔다. 천재적인 두뇌에 침식을 잊을 정도로 공부에 매진한 스님이 스물 셋 구족계를 받을 무렵에는 중국에서 이미 명성이 자자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지도 모른다. 그런 스님이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난 것은 28세 때인 629년, 의역으로 인해 온갖 해석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원전을 통해 오류들을 바로 잡겠다는 서원에서 비롯됐다.

스님은 여러 차례 관청에 청원서를 올렸지만 허가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현장 스님은 마침내 국법을 어기고 성문을 빠져 나갔다. 뒤늦게 스님이 빠져 나간 것을 눈치 챈 조정은 그가 중국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다. 스님은 붙잡히지 않기 위해 낮에는 숨고 밤에는 뛰듯이 길을 재촉했다.



20필 말에 경전 싣고 귀국

스님은 혈혈단신으로 사막을 건너는데 오직 쌓여 있는 해골과 말의 분뇨 등을 보며 전진해 나가야 했으며, 화살 세례를 받기도 하고 휘몰아치는 거센 모래바람 속에서 길을 헤매기도 했다. 당시 당나라의 최전방인 옥문관을 지나자 이미 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각국의 왕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젊은 고승 현장은 그들을 위해 법을 설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천축을 향해 나아갔다. 그를 떠나보내려 하지 않는 왕을 설득하기 위해 목숨을 건 단식을 해야 했으며, 때로는 각국의 고승들과 열띤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사진설명>부처님께 향을 올리는 중국불자들.

“이 중국의 승려는 섣불리 상대할 사람이 아니다. 아마 인도에 가도 저 젊은이 같은 이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논쟁에서 진 승려들은 현장의 탁월함에 놀라 그를 극찬했다.

그는 란저우(蘭州)를 거쳐 둔황, 하미, 투르판, 카라샤르, 쿠처 등 실크로드 북로를 경유해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을 거쳐 카시미르로 향했다. 그 길은 찌는 듯한 더위와 살을 에는 강추위, 거친 폭풍우와 잔인한 도적들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현장은 손오공과 같은 유능한 제자 하나 없이 ‘발길을 돌리느니 차라리 길을 가다 죽겠다’는 각오로 난관을 극복해 갔다.

그가 최종 목적지인 나란다 사원에 도착한 것은 32세 때인 633년. 당시 나란다는 인도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1만명의 스님들이 공부하고 있었으며 삼장법사로 떠받드는 학승만도 10여 명에 이르렀다. 현장 스님은 이중 최고의 법사로 세친의 법손이었던 계현 스님으로부터 유식사상을 배우는 한편 타학파의 철학까지도 폭넓게 익혔다.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의 송곳이 뚫고 나오듯 오래지 않아 현장의 명성은 인도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나란다의 유명한 논사 사마광도 현장 스님과의 논쟁에서 무릎을 꿇었으며, 인도의 대제왕 계일왕이 주관한 18일간의 대·소승 무차대회에서 현장 스님의 논증을 깬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로써 스님은 대승 측에서는 최고의 존칭인 ‘대승천(大乘天)’이라는 영예를, 소승 측에서는 ‘해탈천’이라는 존칭도 얻게 된다. 또 불교를 대표해 종횡무진 활약한다고 해서 ‘석문(釋門)의 천리마’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인도에서 공부와 성지순례를 마친 스님은 641년 가을 귀국길에 올랐다. 인도 왕의 극진한 배려가 있었지만 돌아오는 길 또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645년 2월 우여곡절 끝에 스님은 경전 520묶음을 20필의 말에 나눠 싣고 17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황실과 수많은 백성들은 그의 귀국을 열렬히 환영했다. 처음 스님의 구법을 막았던 당태종도 “목숨을 바쳐 법을 구하고 중생을 이롭게 했으니 경하 드린다”며 앞으로 경전 번역에 전념해줄 것을 당부한다. 현장 스님은 처음 흥복사에 머물다가 얼마 후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이 자은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바로 이곳에 정착해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했다. 특히 절을 지을 때 현장 스님도 여러 인부들과 함께 벽돌을 날랐던 것으로 유명하다.

현장 스님은 664년 『반야경』의 번역을 끝으로 입적하고 만다. 오랜 구법여행으로 인해 생긴 지병 때문이다. 스님은 죽기 전 “나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되 거적에 싸서 산간벽지에 안장해 달라” “죽어 미륵세계에 태어날 것”이라는 말과 함께 편안히 눈을 감는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짐은 나라의 보배를 잃었도다”라며 통곡하고는 성대한 장례를 치를 것을 명했다. 백만 명의 울부짖음 속에 떠나는 장례행렬은 대단히 화려했다. 그러나 현장 스님의 유언은 황제도 어쩔 수 없어 시신만은 거적으로 만든 상여에 안치된 상태였다.


입적 소식에 황제까지 통곡

스님의 동상을 둘러보고 우리는 자은사 경내로 들어갔다. 향을 한 움큼 손에 쥔 한 남자가 법당 앞에서 정성스레 합장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이 절에는 현재 60명의 스님들이 생활하고 있습니다. 경전도 공부하고 예불도 드리며 열심히 수행정진하고 있습니다.”

수행도량보다는 관광사찰 같다는 질문에 이 절에 주석하는 듯한 한 스님이 정색하며 답변한다.

<사진설명>멀리 자은사의 상징인 대안탑이 보인다.


법당을 돌아 대안탑으로 있는 뒤편으로 갔다. 현장 스님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들을 모셨던 탑이다. 스님은 1335권이라는 많은 경전을 번역했지만 스님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론 중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미처 번역하지 못한 경론은 이 탑에 묻어두었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20위엔의 입장료를 다시 내고 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계단 한 계단 정성껏 올랐다. 병중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하고 촌음을 아껴가며 죽는 날까지 번역에 매진했던 스님의 모습이 영상처럼 떠오른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심한 자책감과 부끄러움이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보다 무겁다. 7층 꼭대기에 이르니 뚫린 4면의 창으로 시안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천장에는 연꽃 문양의 그림에 스님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을 보관했음을 알리는 글귀가 쓰여 있다. 같이 올라온 스님이 손을 합장을 한 채 작은 소리로 기도하고 있다. 현장 스님이 그토록 원했던 것처럼 불법이 이 땅 곳곳에 햇살처럼 번져가길 바라는 내용인 듯싶다.

탑을 내려와 경내 상점에 들르니 서명보살 문아 원측(613~696) 스님의 진영이 200위엔에 팔리고 있다. 스님은 신라의 왕족으로 중국불교사의 한 획을 그었던 대학승이었지만 중국불교교단의 질시를 받아 처참하게 왜곡되고 잊혀져 갔다.

1933년 중국인들은 스님의 모습을 새롭게 그리면서 의젓함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불독에 가깝게 표현했다. 취지야 어쨌든 13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원측 스님의 생애와 업적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이르니 자못 씁쓸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글·사진=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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