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禪香 짙은 금오산에서 크게 쉬어 보리라

기자명 채한기

향천사 천불선원

수행하는 스님들이 목숨 바쳐 정진하는 도량, 선원! 올해 동안거 결제에도 전국 90개 선원에서 2000여명의 납자가 방부를 들였다. 은산철벽을 뚫겠다는 선객들의 시퍼런 시선이 꽂혀 있는 선원은 철저한 고독이 살아 숨쉬는 곳이면서도 선승의 푸근한 고향이기도 하다.

<사진설명>점심 공양을 마친 선객이 포행을 나서고 있다. '행주좌와'라 했던가. 산길을 걷는 중에도 화두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수덕사 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있는 충남 예산 향천사 천불선원은 옛부터 구참 납자들이 선호하던 유래 깊은 선원 중 하나다. 천불선원은 극락전에서 약 70여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반드시 경내를 가로질러야만 들어설 수 있다.

향천사는 도심 한복판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사찰로써 평일에도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순례객들의 번잡스런 소리가 수행에 혹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할 정도로 선원은 경내와 가까이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의 기우였음을 금방 알게 됐다.


구참납자가 선호하는 선원

경내에서 선원으로 들어가는 오솔길로 들어서자마자 정말 선원에 온 듯 했다. 경내와 오솔길 초입 거리가 불과 약 5미터 정도인데 이렇듯 분위기가 다를 수 있는 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로 묘연한 기분이 들었다. 금까마귀가 점지해 주었다는 향천사 창건 설화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천불선원을 들어서는 대문의 편액은 ‘천불선원’이 아닌 대휴문(大休門)이다. 이 대휴문은 원래 없었지만 지금의 선원장 옹산(翁山) 스님이 지난 2001년 선원을 맡으면서 직접 써 걸어놓은 것이다. 이 대휴문을 열고 들어서야 ‘천불선원’이라는 편액이 걸린 천불선원을 볼 수 있다.

면벽불이 되어 가행정진하는 도량의 첫 문을 여는 대문에 ‘대휴문’이라는 글씨를 써 걸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선원장 옹산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 “마음을 쉬라는 겁니다. 그냥 쉬는 게 아니고 크게 아주 편안히 쉬라고 하는 뜻입니다.”


보원 스님이 처음 선문 열어

마음을 쉬라. 수행승이 확철대오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 무거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인가. 옹산 스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글귀다.

금오산 품에 살짝 안긴 듯한 천불선원은 소나무와 대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정갈하면서도 고졸미가 배어 있다. 이 천불선원은 1954년 정화대책위원회를 지낸 10인 중 한 스님이며 한암 스님으로부터 법을 받은 보원(寶元) 스님이 향천사에 주석하며 금오선원(金烏禪院)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선문을 열었다.

지난 40여년 동안 매년 8명에서 12명의 선객이 안거 때 마다 이 선원을 찾았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바 있는 청담 스님도 이 선원에서 조실로 주석하며 많은 납자를 제접했다.

1966년 6월 선원에서 정진중이던 설봉, 학몽 스님은 한글로 현토한 『선문염송』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 책은 오늘날 ‘선문염송집’저본으로 삼을 만큼 『선문염송』의 명저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금오선원’에서 ‘천불선원’으로 이름을 바꾼 것은 지난 1989년이다.

천불선원 역시 선방에 전래되는 전통적인 생활규범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두량 족난 복팔분(頭凉 足煖 腹八分)이다. 머리는 시원하게, 발은 따뜻하게, 배는 만복(滿腹)에서 2분이 모자라는 8분으로 하는 것이다. 복팔분 공양을 해야 하는 선승을 위해 후원은 아침 공양으로 항상 죽을 준비한다. 깨죽을 비롯해 팥죽, 콩죽, 잣죽 등 다양하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국수나 떡국, 만두를 빚어 내놓는다. 김치와 숙주나물, 두부를 넣어 만든 만두를 스님들은 참으로 좋아한단다.


새벽-저녁 정진은 자율

올해도 천불선원에는 9명의 스님이 수행하고 있다. 수행중인 스님들의 법명과 법납을 선원장 스님에게 물었으나 입승 스님과 법납이 제일 높은 스님만 알려 줄 뿐이다. 웬만한 수행 경력이 아니고서는 상을 내지 말아야하는 게 수행가풍이고 보면 납득이 간다.

법납 14년의 대정 스님이 입승이고 법납이 가장 많은 스님은 대용스님으로 법납은 50년 세납은 71세다. 대체로 무슨 화두를 들고 있느냐고 선원장 옹산 스님에게 묻자 ‘이 뭐꼬’, ‘무자’, ‘판치생모’ 등 다양하단다. 스님 중에는 묵언 수행을 하는 스님도 있고 하루 한끼 공양하며 수행하는 스님도 있다고 한다. 각기 다른 수행 방식이지만 하나같이 모두 화두타파에 정진하고 있다.

새벽예불과 오전, 오후 정진 시간에는 모두 한 방에 모여 수행한다. 그러나 새벽 예불 후의 정진과 저녁 공양 후의 정진은 자율에 맡긴다. 자율에 맡겼다고 해서 스님들이 화두를 놓는 것이 아니다. 한 방에서 모여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1인1실로 정해진 방에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점심공양을 마친 스님들은 잠시 천불선원 뒷산으로 포행을 나간다. 포행 중에도 화두를 놓치지 않는 선객. 동안거 해젯날 9명의 스님들이 고독의 천불선원에서 마음을 놓고 크게 한 번 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예산=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 향천사는?


금까마귀 날아와 절터 알려 줘

백제 의각 스님이 창건한 고찰


향천사(香泉寺)는 의자왕 16년(656년) 백제 의각 스님이 창건한 고찰이다. 의각 스님은 당나라 오자산에서 3년 동안 석불 3,053상과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16나한상을 조성하였고, 655년 사신을 따라서 불상을 배에 싣고 백제로 돌아왔다.

불상을 실은 배는 오산현 북포 해안(지금의 예산 신암면 창소리)에 이르렀으나 절 터를 잡지 못해 몇 달을 머물렀다고 한다. 이 때 배안에서 치는 종소리가 강촌을 진동해 마을 이름이 종성리(鐘聲里)가 되었다.

부처님 모실 사찰 터를 걱정하고 있던 어느 날 한 쌍의 황금 빛 까마귀가 배주위를 돌다가 사라졌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의각스님이 까마귀를 따라가 보니 남쪽으로 날아가서 지금의 향천사 위치에 내려 앉았다. 금까마귀는 어둡도록 우거진 나무그늘 아래서 낙엽을 헤치고 물을 찍어 먹고 있었다. 그곳은 낙엽에 뒤덮인 약수샘이었고 그 약수에서 나는 좋은 향기로 온 산골이 그윽하였다.

의각스님은 그 까마귀가 부처님 모실곳을 인도 하였음을 깨닫고 이곳에 절을 지어 부처님을 모시고 향천사라 이름지었다.

또 의각스님이 3,053위를 옮겨 모실 때 흰소가 홀연히 나타나 큰 수레를 끌고 와서 날라주고는 절 동구밖에 나가서 고함을 지르며 해탈을 했다는 설화도 전해 내려온다. 그래서 산 이름은 ‘금오산’이라 불려지고 절 이름은 ‘향천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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