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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용성 스님 (1864∼1940)

기자명 권오영

주권 회복 앞장 선 불교사상가

1940년 2월 24일 입적

용성 스님은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는 격동기 속에서 불교사상가이자 우국지사로 명성을 날린 근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선지식이다.

스님은 대각 운동을 펼쳐 침체된 한국불교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불교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역경작업에 주력함으로써 불교를 대중화시키는데 앞장섰다. 또 3·1운동 당시 만해 스님과 함께 민족 대표 33인에 불교대표로 참가하는 등 일제 강점기 속에서 민족의 주권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에도 최일선에 섰던 인물이다.

스님은 열여섯에 삶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던 중 ‘수도 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다시 해인사에서 출가를 한다.

해인사에서 승려로서 기본 소양을 배운 용성 스님은 이후 의령 고운사를 찾아 수월 스님으로부터 대비주를 통한 업장 소멸의 수행방법을 배우게 된다. 파주 보광사로 수행처를 옮겨 대비주 정진을 계속하던 스님은 마침내 칠흑 같은 어둠이 걷히는 경계를 맛보게 된다.


만공 선사 등과 법거량

이후 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 받기 위해 금강산 표훈사 무융 스님을 찾는다. 그러나 무융 스님과의 만남에서 자신의 깨달음이 미숙하다는 것을 느낀 스님은 다시 무(無)자 화두를 통한 선 수행에 몰두한다. 오직 깨달음 얻겠다는 집념으로 치열하게 수행을 거듭하던 스님은 그의 나이 23세 되던 해 마침내 진정한 깨달음을 도달하게 된다.


대중화 위해 경전 한글화

그러나 스님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용성 스님은 전국의 산사를 돌며 당대 최고의 선승으로 추앙 받던 만공, 혜월, 제산 스님 등과 법거량을 하며 자신의 깨달음을 점검하고 끊임없이 수행을 계속했다.

1911년 대중 교화를 위해 서울로 올라온 스님은 시내 한복판에 선종 교당을 건립하고 대중포교에 앞장섰다. 또 일제가 한국불교를 일본불교에 귀속시키려는 것에 반발해 한국불교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 민족불교 운동을 전개한다.

<사진설명>1910년 용성 스님의 모습. 사진제공=대각사상연구원

특히 스님은 1919년 만해 한용운과 함께 3·1운동에 앞장서 투옥되기도 했으며 불교의 대중화와 혁신를 위해 대각사상과 대각교 운동을 펼치는 등 민족 불교를 확립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이와 함께 스님은 일반인들이 쉽게 불교를 접할 수 있도록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겠다는 발원을 세우고 『팔상록』,『원각경』, 『금강경』 등 수많은 경전을 차례로 역경하기도 했다.
힘든 시대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용성 스님은 전통불교의 수호, 불교 대중화와 혁신, 대각사상의 제창과 대각교 표방 등 수많은 업적은 남겨둔 채 1940년 2월 24일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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