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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주 8년, 마음 닦아 詩心 열다

기자명 채한기
  • 불서
  • 입력 2004.03.22 13:00
  • 댓글 0

첫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 펴낸 박규리 시인

후미진 뒷담/손바닥만한 물웅덩이에

서럽도록 환한 달빛!

저물도록 법성포 바닷가를 기웃거리다 돌아오는 길/자칫 헛디뎌 밟을 뻔한

지상에 뜬 달 한줌!

바다도 아니요 호수도 아닌 발 밑, 시궁창이/치자꽃 같은 하얀 달빛으로 가득하다

바로 이 자리에서, 제 속의 출렁거림을/얼마나 깊이 들여다보았던 것이냐

흔들리는 제 맘을 얼마나 간절히 내린 것이냐

급한 물살에는 그림자도 쉬어가지 못하건만/넓고 큰 바다만 그리던 나

어리석음의 파도를 걷어내고/이 자리에, 바로 이 웅덩이에 내 설움 내려놓을 수 없을까


‘지상에 뜬 달 한줌’ 전문


박규리 시인의 첫 시집『이 환장할 봄날에』(창작과비평사)는 범상치 않은 시적 내공이 한껏 응축된 시집이다. 처절하리만치 강인한 시어들은 오히려 너무도 애절해 차라리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차마 떨치지 못한 삶의 티끌마저 암자에 서서 허공으로 날려버리려 애써보지만 이내 자신의 가슴속에 다시 묻어두고야 마는 애처로움이 시 전편에 배어있다. 왜일까.

고창 미소사 공양주 보살이 낸 시집이라는 포커스보다는 시인 박규리가 공양주가 된 사연에 초점을 맞춰야 풀릴 듯 하다.


시인에서 공양주로

여고시절 때까지도 몸이 아파 택시를 타고 등교해야만 했던 소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고 엄마 품에서 ‘세상에 이렇게 불쌍한 것이 여자라니까’라며 펑펑 울던 소녀는 문학잡지를 탐독해 가며 시인의 꿈을 키워갔다. 한 대학의 약대생이 된 숙녀였건만, 문학 열병을 앓고 있던 그녀는 결국 중도에 대학을 그만둔다.

대학 중퇴 후 신경림, 정희선 시인을 만나 본격적인 문학지도를 받던 그녀는 1995년 ‘민족예술’을 통해 문단에 첫 이름을 올렸다. 병명조차 알 수 없는 지병으로 이미 쇠약해져 있건만 시집 한 권 세상에 내 보겠다는 당찬 야심(?)은 꺾을 줄 몰랐다. 결국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잠시 뉘일 곳을 찾던 그녀는 평소 집안과 친분이 있던 고창 미소사로 발길을 돌린다.

공양주 없는 작은 암자에서 박규리 시인은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공양을 올리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산사에 머물면서도 그녀는 시집 출간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하루빨리 한 권의 시집만 갈무리하고 하산하려 했던 박규리의 공양주 일은 그로부터 8년여 동안 지속된다. 왜 그랬을까.


“금강경은 나의 스승”

“금강경은 나를 바꿔놓은 큰 스승입니다. 아상을 버리고, 버리는 마음마저 버리면 이 세상 전부가 다 시일 것이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그토록 깊은 편견과 아집으로 가득 차 오로지 분별 속에서 깜깜한 방안을 헤매이던 제가, 드디어 하늘을 바라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하염없이 작고 작은 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어요.”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면서 그녀는 당장 시를 쓰지 않고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 본 후 써 내려간 시는 점차 문단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각종 문예지에 작품이 하나 둘씩 실리고 1999년 ‘좋은 시 99’에 작품 ‘치자꽃 설화’가 선정되는가 하면 좥시평좦에 작품‘그 변소간의 비밀’이 ‘올해의 좋은 시’로 선정됐다. ‘그 변소간의 비밀’은 2003년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좋은 시’로도 선정됐다.

『이 환장할 봄날에』는 지난 8년여 동안 ‘참나’를 찾아가며 조금씩 변모해 가는 시인의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신경림 시인은 “새파란 칼날의 매서움과 봄 햇살의 부드러움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평한다.

수행승의 경계를 함부로 넘지 않으면서도 그 경계선에서 자신의 심상을 하나 둘씩 풀어가는 박규리의 선적 내공도 일품이다. ‘지상에 뜬 달 한줌’을 비롯해 ‘상추’, ‘가시방죽’, ‘잃어버린 안경’, ‘모래 한 알로 사는 법’, ‘가을비’, ‘사무친 길’ 등을 통해 그녀의 선기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채한기 기자 penshoot@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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