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8.지월 스님 (1911∼1973)

기자명 권오영

해인총림 ‘주리반특가’

1973년 3월 27일 입적

부처님의 제자 주리반특가는 머리가 둔한 데다가 배운 것도 없어 매우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수행정진에 임해 마침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평생을 가야산 총림에서 수행정진에 임했던 지월 스님은 해인사의 ‘주리반특가’로 불린 인물이었다. 서슬 퍼런 선기나 출중한 면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 마침내 선지식의 경지를 이룸으로써 모든 대중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인품과 생애가 주리반특가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1911년 2월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지월 스님은 16세에 출가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지암 이종욱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상원사 한암 스님 밑에서 수학했다. 스님은 금강산 마하연 만공 스님 회상에서 수행하던 어느 날 문득 ‘환영이 만들어낸 텅 빈 몸뚱아리가 곧 천진스러운 부처’라는 경계를 홀연히 깨달아 체득했다. 개안(開眼)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성철 스님도 존경한 인물

그러나 지월 스님은 역대 선사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실천하며 수행정진에만 묵묵히 임할 뿐, 스스로 깨달은 자라고 자만하거나 자비와 인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내세우지 않았다.

스님은 마치 『법화경』의 상불경 보살처럼 모든 사람을 보살이라고 부르고 실제 보살로서 대하며 자신을 낮추는 인욕·자비 보살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종단 위해 축성여석회 결성

스님의 이런 점 때문이었을까. ‘가야산의 호랑이’라고 불리던 성철 스님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머리를 숙인 몇 안되는 사람이자 대화를 할 때 존대를 했던 몇 안되는 인물 중의 하나가 바로 지월 스님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평생을 수행 정진에만 전념하던 지월 스님은 50∼60년대 종단이 정화로 몸살을 겪자 청담, 운허, 홍경, 탄허, 고암, 구산 스님 등 당대 고승들과 ‘축성여석회(築城餘石會, 남은 돌들의 모임)’를 만들어 종단의 대소사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후학들을 가르치는데도 지극한 정성을 기울였다.

<사진설명>남은 돌(여석회)의 모임. 가운데줄 맨 왼쪽이 지월 스님.

1973년 몸이 쇠약해져 자리에 눕게 되자 지월 스님은 제자들에게 “수행력이 모자라 이렇게 눕게 돼 면목이 없습니다. 놀지 말고 수행하세요”라는 말을 남겨둔 채 그 해 3월 27일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